환경사회학 개론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한 환경사회학』(찰스 하퍼)에 기초하여 작성)

 

1. 환경사회학이란 무엇인가

 

‘환경사회학’을 정의하기 위해선 먼저 근대적인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에 대해 재사유해야 한다. 근대인은 사회문화현상과 자연현상을 분리해서 사고하는데 익숙하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문화-사회제도-사회구조-사회연결망 등과 같은, 자연환경으로부터 독립적인 ‘문화영역’을 향유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환경의 영향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고방식이다. 고전사회학 자체도 생물학적 결정론(biological determinism)을 배격하면서 발달한 바 있다. 고전사회학이 등장한 것이 산업사회의 태동과 시기적으로 겹치는 것은 우연이 아닌데, 고전사회학이 전제하고 있는 ‘근대적 이분법’은 곧 초기 산업사회의 지배적인 세계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즉, 고전사회학은 근대적인 인식론에 입각하여 인간을 ‘문화와 기술을 통해 자연 환경의 한계를 변화, 조작, 때때로 초월하는 유일한 능력’(45)을 갖는, 자연환경과 구별되는 존재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인간은 자연환경에 지속적으로 개입하고, 자연환경은 다시 인간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양자를 분리하여 사고하는 고전사회학의 시각은 한계가 많다. 예를 들어, 인간의 ‘단일 경작 행위’(단일 품종 농산물을 대량 경작하는 행위)는, 충분히 ‘자가-방어적’인 생태계를 개간하여 생물학적 다양성과 복잡성을 감소시킨다. 유전적 다양성이 부족해진 작물은 유전병에 취약해진다. 자칫하면 단 하나의 바이러스만으로도 종 전체가 멸종할 수 있다. 멸종 위험에 빠진 작물은 다시 인간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끼친다. 아일랜드 대기근은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유진 오덤 (E. P. Odum)이 창시한 ‘생태학’은 이와 같은 인간과 자연환경 사이의 상호작용 양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캐턴과 던랩(Catton & Dunlap, 1978)은 위와 같은 관점에서 고전 사회학이 ‘인간면제주의 패러다임(HEP: Human Exceptionalism Paradigm)’에 기반하고 있었음을 폭로하며, 사회학이 ‘신생태적 패러다임(NEP: New Ecological Paradigm)’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사회학과 달리 환경사회학은 ‘환경’을 ‘사회화(정치화)’하고, ‘사회’를 (자연)환경 속에 배태된 것으로 이해하는, 보다 진일보한 사회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전사회학으로부터의 단절 선언에도 불구하고 ‘사회이론과 사회학의 녹색화’(60)는 다시 ‘마르크스 – 뒤르켐 – 베버’로부터 출발한다(60-69).

 

환경의제들은 사회문화 현상과 깊이 연루되어 있지만, 동시에 과학적 사실관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회문제들과는 질적으로 상이하다. 따라서 여타 사회과학과 구분되는 의미의 환경사회학적 시각이 요청된다. 지구온난화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환경의제의 독특한 인식론적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요한 환경의제인 에너지 고갈 문제와 자연자본 문제(토양, 수자원, 산림, 종다양성의 오염과 소실 문제)는 각각 부분적으로 지구온난화의 원인과 결과이므로, 결국 환경담론의 중추는 ‘기후 위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구온난화의 가속화와 그 심각성은 과학적으로 합의가 된 사안임에도, 여전히 그 실체를 두고 매우 첨예한 논쟁의 일고 있다.

 

지구온난화 문제의 ‘어려움’은, 오존층 파괴 문제의 ‘손쉬움’과 비교할 때 명료 해진다. 1974년 오존층 파괴가 처음 관측되고, 1985년 그 심각성이 다시금 대두되자, 1987년에 국제사회는 ‘몬트리올 의정서’를 통해 오존층 파괴의 원인인 CFC 가스 배출 감축에 손쉽게 합의한 바 있다. 실제로 합의 이후 CFC 생산은 급감했고, 오존층은 실제로 회복되어, ‘오존층 파괴 사례’는 ‘과학적인 합의와 이에 대한 정책적 해석, 국제적인 중재, 책임 있는 정치와 타협, 그리고 공공 교육을 포함하는 환경문제에 초점을 맞춘’(141) 매우 모범적인 환경문제 해결의 사례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해관계자가 훨씬 많고, 변화를 위해 감수해야 할 비용이 큰 ‘탄소배출’ 문제에는 동일한 메커니즘이 적용되기 어렵다. 탄소배출 감축의 직접적 이해당사자인 미국의 대기업과 협회들은 담합하여 로비를 통해 비과학적인 필자들을 동원하여 기후위기 문제를 사소한 것으로 취급, (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급진적 환경주의자’와 ‘자유주의자(리버럴)’들을 비난하는 대중서들을 유포하고 있다(최근 국내에도 이런 류의 책들이 여럿 번역되어 소개되었으며, 꽤나 이례적인 주목을 끈 바 있다 - 『종말론적 환경주의』(패트릭 무어, 2021),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마이클 셸런버거, 2021), 『팩트풀니스』 (한스 로슬링, 2019), 『불편한 사실』 (그레고리 라이트스톤, 2021) 등). 이는 기본적으로는 ‘탄소감축’을 둘러싼 이해관계 대립이 오존 문제보다 훨씬 첨예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지만, 동시에 기후변화와 같은 ‘거대 문제점(metapeoblems)’(133)이 일반인들에게 즉각적으로 경험되기 어렵다는 ‘위험의 인식’ 문제와 깊이 관련된다. 게다가 구체적 사실관계를 두고 마치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언급되는 과학적 사안에 대해 일반인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결국 일반인에게도 기후문제가 직접적인 ‘위험’으로 인식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며, 여기엔 정치적인 과정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환경사회학의 시각은 ‘환경문제를 정치화’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2. 환경담론의 유형화

 

성장을 바라보는 지배적인 두 시각은 각각 맬서스와 콩도르세로부터 연원한다. 맬서스는 식량은 산술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지구가 자원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성장은 침체될 것이며, 인류는 계속해서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지구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며 정해진 ‘환경용량(carrying capacity)’이 있기 때문에 성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태주의적) 신맬서스주의’ 시각으로 이어졌다. 신맬서스주의는 인구증가가 ‘지구적인 사회 안정화, 인간의 물질적인 복지, 그리고 환경 보전을 위협한다’(259)는 주장을 통칭한다. 반면, 콩도르세는 과학적 낙관주의의 원조로, 인류가 기술진보를 통해 성장 과정에서 마주치게 되는 상쇄요인들을 모두 극복할 수 있다는 입장을 대표한다. 인간의 창의성을 강조하며 인구증가가 오히려 성장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하는 ‘공급측면인구학(supply-side demography)’과, 시장이 자원압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여 ‘인구, 자원, 환경을 균형 있게 재조정’(264)할 것이라고 보는 ‘신고전경제학’은 콩도르세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환경 쿠즈네츠 곡선은 경제성장 및 소득의 증가가 초기 단계에는 환경오염을 증가시키지만, 최종적으로는 환경오염을 감소시킬 것이라는 신고전 경제학의 시각을 대표한다.

 

빈곤의 원인으로 인구증가로 인한 자원압박보다 불공평한 분배의 문제를 강조하는 입장은, 일찍이 맬서스를 비판했던 맑스의 입장을 따른다. 환경황폐화의 원인을 ‘책임 있는 정부와 자유 시장의 부재와 권위주의’(267)에서 찾는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의 입장도 ‘불평등 관점’에 포함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환경보호 자체보다, 인간사회 내부에서 자원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불평등관점’은 생태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구증가와 환경황폐화를 모두 실제적인 문제로서 바라보기 때문에’(270) 생태주의와 연대할 수 있다.

 

<표1>

18~19세기 20세기 초 20세기 후반 ~ 현재
맬서스 신맬서스주의(P. Ehrlcih) ‘성장의 한계’학파, 생태발자국
“인류세(Anthropocene)”
콩도르세 공급측면인구학
신고전경제학
지속가능한 발전, “ESG 경영”
생태적(성찰적) 근대화 (Giddens, Beck)
마르크스 불평등관점(Sen)
갈등이론(Schnaiberg)
“마르크스주의 생태학”

 

20세기 후반이 되자 탈성장을 주장하는 ‘성장의 한계(Limits to Growth)학파’가 새로운 맬서스의 계승자로 부상했다. 이들은 ‘생태발자국’ 같은 지표를 만들어 인간의 활동이 환경에 얼마나 부담을 주는지 측정하기도 했다. 파울 크뤼천과 유진 스토머가 제시한 ‘인류세(Anthropocene)’ 개념은 ‘맬서스주의’의 가장 최근 논의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인류세’란 ‘홀로세(Holocene)’ 이후의 새로운 지질학적 시간단위를 의미한다. 이 개념은 과거 어느 시점부터 인간이 생태계의 주요한 행위자로 부상했으며(그 구체적인 시기가 언제였는지는 논쟁 대상이다), 인간의 행동들이 지구과학적으로 유의미한 변화를 실질적으로 야기하고 있다는 주장을 함축한다.

 

1980년대부터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통해 생태적으로 덜 파괴적인 방식으로 근대 산업주의를 ‘합리화’시키자는 ‘생태적(성찰적) 근대화’ 담론이 등장했다. 생태적 근대화론은 일종의 ‘우파적 환경주의’의 대표로서 각종 정부 및 기업(최근 ESG 경영 논의 역시 지속가능한 발전 논의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의 후원과 관심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다.

 

좌파적 환경주의는 ‘성장의 한계’ 담론과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의 논의를 절충, 종합하는 것을 통해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선 ‘불평등 관점’과 ‘(생태적) 신맬서스주의’가 충돌하는 지점보다, 공유하는 지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3. 환경보호 논의: 거시적 방법(시장, 정부)과 미시적 방법(환경운동)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시장이나 정치를 활용하는 거시적인 방식과 사회운동(집합행동)을 통해 개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미시적인 방식이 있다.

 

시장을 자원배분의 기제로 간주하는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에게 환경파괴는 시장이 효율적인 자원배분에 실패한 대표적인 ‘시장실패(공유지의 비극, 외부효과)’의 결과이다. 이론적인 일관성을 지키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택하는 관점은 ‘합리적 선택이론’이다. 합리적 선택이론의 함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별 행위자들의 선한 의지나 이타심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환경비용을 내부화 시켜서 유인체계(incentive)를 재설계하라는 것이다. 개별 행위자들이 ‘이윤극대화’ 원리에 따라 행동한 결과가 곧 공공을 위해서도 최적의 선택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녹색세금’이나 ‘보조금’ 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시장실패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시장 메커니즘에 의존하는 이런 신고전파적 해법은 불확실한 정치, 문화적 변수를 고려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니기 때문에, 다각적인 정치적 행동을 통해 ‘환경규제국가’를 창출하는 방법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환경규제국가가 주로 유럽에서 등장하는 것은 유럽이 대부분 ‘의회제적 민주주의’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규제 국가의 공공정책 수단으로는 ‘교역가능환경허용(TEA: Tradable Environment Allowance)’과 ‘지역사회자원관리(CRM: Common Resource Management)’ 방식이 있다.

 

환경과 관련된 사회운동의 양상들은 미국 환경주의(environmentalism)의 역사 속에서 발견된다. 로버트 브럴(Robert Brulle)은 미국의 환경주의를 8가지로 분류한다. 환경운동의 초기 형태인 ‘보전주의’의 주창자인 조지 퍼킨스 마시, 존 뮤어, 알도 레오폴드는 윤리적인 입장에서 생태계파괴와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면모를 보였는데, 이런 주장은 당시 옥외휴양과 산림 파괴 등에 관심이 많았던 중상 계층 이상의 유한계급에 대해서만 호소력을 가졌다.

 

1960년대부터 부상한 ‘개혁 환경주의’는 자연파괴가 인간의 복지에 실질적으로 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저술들을 통해 대중화되었다(레이첼 카슨(1962), 개릿 하딘(1968), 폴 에얼릭(1968), 배리 코머너(1971) 등). 개혁 환경주의는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을 성공적으로 증폭시켰지만, 백인 중산계급의 후원에 의지하는데다 지나치게 과학적인 성격 때문에, 우호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동원능력이 미약했다.

 

환경문제를 ‘풀뿌리’ 수준에서 이익집단정치의 영역으로 ‘민주화’시킨 것은 ‘환경정의 운동’부터였다. 환경정의 운동은 울리히 벡의 지적을 따라, 환경파괴로 인한 위험이 계층에 따라 불균등하게 분배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예컨대 환경파괴로 인한 위험은 백인 중산층보다 흑인 하층민들에게 더 직접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정의 운동은 환경문제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무산계급 시민들이 풀뿌리 조직을 형성하여 적극적으로 일방적인 위험전가에 저항할 것을 주문한다. 명확한 이익정치를 표방하기 때문에 이 운동은 (개혁 환경주의의 엘리트주의적인 성격에 비해) 반지성주의적으로 퇴행할 위험이 있다. 이 운동이 환경보호 자체를 옹호하는 진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그 지향을 ‘NIMBY(Not In My Backyard)’로부터‘NIABY(Not In Anybody’s Backyard)’로 이행시켜야 할 것이다.

 

심층생태학, 생태 여성주의, 생태신학 등은 여전히 배타적 인간중심주의에 갇혀 있는 환경정의 운동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환경주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4세대’ 환경주의의 문제점은 비과학적이라는 것이다. 급진성을 추구하다 보니 과학적 엄밀함을 포기하고 말았다.

 

<표2>

1세대 (1870~) 1)    보전(presevation)
2)    보존(conservation)
3)    야생관리(wild management)
“윤리적”
(유한계급)
2세대 (1960~) 4)    개혁 환경주의 (Reform Environmentalism) “과학적”
(중산층)
3세대 (1970~) 5)    환경정의 (Environmental Justice) “정치적”
(중하층)
4세대 (1980~) 6)    심층생태학
7)    생태 여성주의
8)    생태 관념주의
“급진적”

(내주는 “찰스 하퍼, (2010),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한 환경사회학』, 한울(한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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