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대한 잡담 (2) – 왜 읽는가?

1.

아주 어릴 때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세속적 성공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국어 능력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어서 언어적 두뇌가 일찍이 발달한 경우, 아무리 상식과 교양이 부족해도 제한된 시간 안에 기계적으로 텍스트를 소화해내는 것이 관건인 수능이나 리트(LEET), 피셋(PSAT) 같은 언어 시험은 잘 볼 수 있다. 그 시험들을 잘 보면 변호사도 되고 공무원도 될 수 있다. 상식, 교양, ‘지식’은 ‘지능’과는 별 상관이 없다. 그러나 ‘머리가 굳은’ 성인기 이후에 과하게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여러모로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2.

우선 잡념이 많아져서 일상생활을 하는데 방해가 되고, 애매한 잡지식이 늘어서 허무맹랑한 사람을 만든다. 대표적인 것이 나다. 예를 들어 나는 로스쿨이나 의대에 진학한 친구들이나, 오늘날 ‘문과 최고의 아웃풋’으로 불리는 CPA나 행정고시에 합격한 친구들이 기이할 정도로 부럽지가 않다. 그래서 때로 적절한 축하 인사를 건네는 데 실패하기도 한다. 그게 축하할 일인지에 대해 진심으로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친구가, 예컨대 (나보다 먼저) 등단을 한다거나, 영화를 만든다거나, 대학원을 간다거나 한다면 몹시 배가 아프고 불안에 시달릴 것 같다.

‘남들이 알아주는’ 세속적 성공에 대해, 정작 완전히 자유롭지도 못하면서, 책 좀 읽었답시고 초연한 체, 고상한 체하고 싶은 것이거나, 끝끝내 ‘나는 뭔가 다를 것’이라는 망상에 젖어 있는 것일테다. 주제파악도 못하고 꼴에 무슨 ‘비판적 지식인’ 행세라도 하고 싶은 걸까. 알면 뭘 얼마나 더 안다고? 따지고 보면 그게 다 책을 많이 읽어서 그렇다. 내가 읽는 책의 저자들이 대부분 ‘대단하신 비판적 지식인 선생님들’이라서 그런지 멀쩡한 생활인들을 폄하하는 뉘앙스가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

차라리 내가 딱히 개성이 없고, 이런 쪽(?)에 대한 어쭙잖은 허영심이라도 없었다면 별다른 고민 없이 대세를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한때 철학에 심취했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문학의 신봉자로서, 다 접고 로스쿨이나 가자는 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진퇴양난이다.

 

3.

독서는 실천적으로도 무력하다. 다독과 성찰은 보수적인 인간을 만든다. 요즘 들어 부쩍 내가 ‘보수화’되었음을 느낀다. 분명히 내 독서 이력의 상당 부분이 넓은 의미의 이른바 ‘좌파적 교양’을 쌓는 것이었음에도, 요즘은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글은 아예 읽지 않게 되었다. 특히 문화연구 쪽 책들을 정말 싫어하게 됐다. 온갖 곳에 ‘호모 사케르’니, ‘서발턴’이니, ‘다중’이니, ‘탈영토화’니, ‘수행성’이니, 견강부회하면서 빈약한 사유를 감추려는 어설픈 글들이 정말 많다. 그렇지만 그렇게 ‘이론’을 가지고 내리찍는 식으로 글을 쓰는 건 ‘문화’에 대한 관찰도 아니고, ‘연구’도 아니다. 그런 식으로 하자면 나도 단어 몇 개 가지고 연구자 행세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언급한 용어들이 대부분 모종의 실천과 저항을 촉구하는 ‘문화-좌파(?)’스러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바, 결과적으로 이런 걸 마뜩잖아 하게 된 나는 상당히 ‘보수화’된 셈이다. 그리고 그건 다독의 결과 까다로운 인간이 되어버려서, 규범적인 과격함으로 분석의 불철저함을 감추려는 글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그게 그런 글을 쓴 저자의 한계인 것만은 아니고, 이치 상 분석적으로 치밀하고자 하면 실천적으로는 한 발짝도 나아가기 힘들다. 반대로 말하면, 실천하고자 한다면 논리적이지 않아야 한다. 어차피 실천은 ‘전망 없이’, ‘의지의 낙관주의’에 기대어 다소간 ‘주의주의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책 읽기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행동하고자 한다면, 적절한 시점에 독서를 멈추고 거리로 나가야 한다. 고민이 길어지고 생각만 많아지면 섣불리 행동하기 어렵다. 그렇게 되면 실천하는 사람들이 다 우습게 느껴진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행동하는 이들을 오만하게 평가하다니, 독서인이란 얼마나 한심한가? 나는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서 한심한 인간이 되었다.

행동하고 실천하는 일은 물론 중요한 일인데, 요즘은 그런 것에 대해 의심과 회의가 앞선다. 어차피 최종적으로는 민주당 뽑을 지 저쪽 당 뽑을 지의 문제로 수렴하는 게 작금의 정치문제 아닌가. (아니면 어쩔 건데?) 그런 판에 ‘호모 사케르’가 다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괜히 규범적으로 ‘오버’하기보다, 분석적으로 엄밀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 요즘의 생각이다. 혹자는 그게 바로 ‘보수화’라고 꼬집을 텐데, 딱히 부정하기 어렵다.

 

4.

심지어 독서 자체는 지식의 생산에도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 오늘날 지식의 생산은 다독에서 오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있는 도서들은 대부분 입문서, 해설서, 교양서인데, 이런 것을 많이 읽어봐야 유의미한 지식생산에 기여할 수 없다.

사회과학 분야를 예로 들자면, 전문적으로 지식을 생산하는 대학에서는 일단 통계와 데이터가 중심이고, 이론은 거들 뿐이다. 막스 베버를 원전으로 숙독한 ‘이론’전공자보다, 회귀분석을 배운 학부생이 지식을 생산하기 더 쉬운 세상이 되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베버는 다이제스트로 충분하다. 문해력이 아무리 떨어지고 성찰이 모자라도 데이터를 잘 돌리면 사회학자가 될 수 있다(심지어 경우에 따라 통계학적 지식이 없어도 데이터를 돌릴 수는 있다). 그걸 제대로 된 연구자라고 할 수 있는 지의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통계가 쓰이지 않는 분야의 경우에도, 학술적 의사소통은 20~30페이지짜리 ‘학술저널’로 이루어지지, 한국 스타일의 단행본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다못해 ‘전문연구서’ 정도는 읽어줘야 하는데, 국내에 번역 출판되어 있는 주요 연구서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나 자신도 요즘 읽는 책들이 하나같이 시시한 교양서들 뿐이라 자괴감이 든다. 그러니 이 땅에서 한국어로 된 책을 많이 읽는 것의 ‘학술적인’ 의미는 0에 수렴한다. 차라리 회귀분석과 Stata를 배우자.

내가 느끼는 바, 출판계와 문화계 특유의, 반지성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묘한 자조적 패배주의 혹은 학계에 대한 반감은 부분적으로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나도 예전에는 같이 어울려서 자조하고 강단 학자들을 조롱하는 편이었으나, 요즘은 그것도 참 없어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다독과 성찰 없이도 ‘데이터를 고문해서’ 논문을 양산해내는 것이 가능해진 시대에 ‘요즘 대학생들은 책을 많이 안 읽어서 문제’라는 것도 이제는 촌스러운 훈수가 아닌가 싶다. 요즘 대학생들은 책은 안 읽지만 파이썬도 하고 다중회귀분석도 한다. 괜히 인문학 운운하며 말장난 흉내내는 것보다는 그런 식의 데이터 리터러시를 갖추는 것이 여러모로 바람직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5.

결국, 일반적으로 책을 읽는 것으로부터 기대되는 긍정적인 효과들이, 사실은 독서로부터 기대하기 어려운 것들이라면, 나는 왜 읽는 것인가?

생각해보니 나의 경우 독서는 루틴이다.

원래 인간의 삶은 무의미하고 덧없어서, 우리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루를 24시간, 일주일은 7일, 일년은 365일로 정한 다음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그게 끝날 때마다 그걸 기념하는데, 나한테는 독서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 시간이 60분인 것과 같은 원리로, 나에게 책 한권은 반나절이다. 책 한권을 완독하면(책의 죽음), 그걸 정리하는 글을 쓰는 것으로 나는 나의 독서를 기념한다. 나의 시간은 책을 읽는 시간과 책을 읽지 않는 시간으로 나뉜다. 다른 일이 많아 책을 못 읽을 때엔, 그 일을 끝내고 책을 읽을 생각으로 참고 견딘다. 읽을 책이 남아 있기 때문에 더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서도 아니며, 뭔가 대단한 걸 깨닫거나 교양을 쌓기 위한 것도 아니다 – 과거엔 그런 의도도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런 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박자, 리듬, 패턴 같은 것이다. 그게 없으면 생은 악몽 같은 어떤 뭉쳐진 덩어리일 뿐이다. 그걸 쪼개고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른 법.

요 근래 자주 보이는 내 또래의 ‘헬스애호가’들 역시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삶에 패턴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산소 운동 n분, 근력 운동 n분. 그리고 그걸 기념하고자 헐벗은 채로 인증샷을 남긴다. 독서로 치면 비소설은 유산소, 문학은 근력운동쯤 될까. 자극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네들이 벗은 몸을 SNS에 찍어 올리듯 나는 블로그에 발가벗겨진 내 자의식을 글로 써 올린다. 속옷이라도 입는 그들이 나보다는 신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루틴’은 내 ‘루틴’과 달리 수명 연장과 건강 유지는 물론, 심미적으로도 명백한 효용이 있다.

사실 독서량이란 어차피 상대적인 것이라 내가 특별히 책을 대단히 많이 읽는 편이라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는 책을 기준으로 내 삶에 규칙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내 삶은 책 위주라는 것이다. 나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고, 그게 아니면 내 삶에 규칙과 패턴을 부여할 수단이 딱히 없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읽는 것이라는 사실이 이 글을 쓰면서 명백 해졌다.

그러니까 다시, “왜 읽는가?” – 그건 단지 읽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약간 중독된 것 같기도 하고.

 

5.1

헬스와 같은, 독서행위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효용에 대해서는, 강유원 박사의 글에 잠정적으로 동의해두는 것으로 판단을 유보하기로 한다.

‘고귀한 삶’이라.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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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역사 공부를 하면서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성과를 이야기하겠습니다
. 우리는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인생의 질을 바꾸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역사는 물론이고 인문학 공부의 근본적인 목적은 이것입니다. ‘우리 집에서 책 읽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집에서는 역사 책을 읽고 있으면 부모가 뭐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고 꾸중을 할지도 모릅니다. 한국 사회 전체를 놓고 생각해보아도 ‘역사 책을 뭣 하러 읽어, 그럴 시간 있으면 쓸모 있는 공부나 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절대 다수일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라 전체의 수준을 높이려면 나머지 소수가 결단해야 합니다. 그 소수라 해서 대단한 엘리트에 속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사실 한국 사회의 엘리트들은 나라 전체의 수준을 높이기보다는 엘리트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늘리는데 더 관심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니 우리처럼 평범한 소수의 사람들이 힘든 형편을 감내하면서 역사 공부, 더 나아가 인문학 공부에 매진해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 물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한국 사회와 역사에 기여하는 게 뭡니까?”라고 말입니다.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당연히 기여합니다. 굉장히 많이 기여합니다. 우리는 역사 공부, 인문학 공부를 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교양, 시대의 교양에 기여하다가 죽습니다. 즉 무명의 독자와 공부인으로 죽는 겁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21세기 한국의 교양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죽는 것. 이게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입니다. 이름 없는 사람으로 죽는다 해도 그것은 고귀한 삶을 산 것입니다. 고대의 희랍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을 ‘필로칼리아(philokalia)’라 불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목표여야 합니다.

강유원, 『역사 고전 강의』, p. 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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