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대한 잡담(1): “남들보다 잘하고 싶은 게 뭔가요?”

1.

“남들보다 잘하고 싶은 게 뭔가요?”

잠시 머뭇거리다 ‘글쓰기’라고 대답했다.

얼마전에 우연히 학교에 심리 상담 센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등록금도 냈겠다, 특별히 심리적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졸업 전에 한 번쯤 그런 것을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과감하게 심리검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심리학 자체에 특별히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카운슬링, 내면탐구, 뭐 그런 것을 원래 좋아한다. 초기조건을 정확하게 알면 그 물체의 미래를 알 수 있다는 물리학의 법칙을 따라, 인간의 운명이나 인생의 향방도 그 사람의 타고난 기질과 성향을 정확하게 파악하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은영 박사가 출연하는 방송의 유튜브 클립들도 챙겨보는 편이다. 지나치게 스스로에게 몰입해 있는 인간으로 보이고 싶진 않지만, 그걸 보면서 나도 전문가에 의해 내 심리를 ‘부검’당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했었다.

내가 원래 좀 방어적인 인간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별 걸 다 물어보네’ 싶은 질문들이 많아서 다소 부담스러웠다. 심리상담은 원래 그런 것인가. 사실 나는 ‘정신적 과잉활동인’에 가까운 사람이라, 나 자신에 대한 웬만한 ‘깊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다 생각해둔 답이 있는 편이었고, 그러다 보니 상담사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마치 준비된 답을 말하는 발표처럼, 상담사의 해석을 듣는 것은 알고 있던 답을 확인하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내가 때로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내가 나만의 생각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인데. 그 문제는 어차피 심리학이 아니라 철학으로도 해결이 어려운 문제다.

그런데 ‘남들보다 잘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는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꼭 ‘남들보다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지금까지 나는 ‘딱 봤을 때’ 내가 잘하기 어려운 기예일 경우, 굳이 미련을 품고 열등감을 느껴가며 남을 이겨 먹겠다는 식으로 부딪히기보다 ‘더러워서 안 한다’는 식으로 내팽개쳐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들보다 잘하고 싶은 것’이라니, 말문이 턱 막혔다.

하지만 그건, 아무리 꼴불견인 내담자도 기꺼이 응대해야 하는 심리 상담사라지만 학생 주제에 지나치게 학자연하는 꼴이 볼썽사나워 보이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사회적 자기검열이 작동한 결과였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것은 그 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나는 사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글쓰기’라는 것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결국 남들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었다.

 

2.

나는 내 글이 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왜 이렇게 글을 못쓸까’가 내 스트레스의 팔 할은 된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는 도중에도 거의 강박적으로 검독과 퇴고를 무한 반복한다. 글쓰기에 대한 나의 기준이 특별히 높고 까다로운 것이어서라거나, 문장 속에 무슨 대단한 미학을 구현하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더 나은 단어를 고르고, 어미를 자연스럽게 고치고, 문장을 늘일 것인지 끊어 쓸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요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이지만, 또 그게 재밌으니까 나는 아무도 시키지도 않은 (심지어 딱히 많은 사람들이 보지도 않을 것이 분명한) 블로그까지 운영해가며 ‘이 짓’을 하고 앉아 있는 것이다.

가끔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남의 블로그를 염탐하는 것도 나의 관음증적인 취미의 하나인데, 개중에서 꽤 괜찮은 글이거나 내가 보기에 잘 쓴 글이 있으면 나는 이런 저런 단서를 종합해서 반드시 그 필자의 나이를 추정한다. 나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것이 분명한데도 (심지어 어린 데도) 나보다 글을 잘 쓴 사례를 보면 그렇게 절망적일 수가 없다. 그런 날에는 ‘어떻게 하면 글을 더 잘 쓸 수 있는지’를 고통스럽게 고민한다. ‘다독, 다작, 다상량’이 글쓰기의 비책이라고 하는데, 내가 그 블로거보다 세 가지 중 무엇이 더 부족한지를 곱씹고 또 곱씹는다.

 

3.

내가 견딜 수 없어 하는 것 중 하나는 타인이 내 글에 대해 훈수를 두는 것이다. 얼마 전에 또 한 번 느낀 것이지만, 나는 확실히 다른 사람에 의해 내 글이 ‘일점일획’이라도 ‘첨삭’당하는 것을 매우 불쾌해한다. 쓸데없는 자존심인 것일까. 하지만 첨삭하는 쪽이 무슨 대단한 시인이거나 교수인 것도 아니고(시인이나 교수도 시인이나 교수 나름이긴 하지만), 동의할 수 없는 지적사항이라면 나는 매우 방어적으로 변한다. 수긍할 수밖에 없는 지적을 듣지 않기 위해 퇴고에 그토록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겨울에 언론고시 지망생들이라면 모두 한 번쯤 다녀본다는 H 학원에서 모 기자의 논술강의를 수강했다. ‘기레기’같은 혐오표현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시대라지만 그래도 나는 글밥 먹는 사람들로서의 기자 직군에 대해 일정한 존중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만국공통, 시대초월의 대단한 글쓰기 비책을 얻어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언론사 입사에 적합한 형태의 글쓰기를 배워보려고 학원까지 온 것이니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매우 저자세로 시작했다. 기꺼이 여러분의 훈수와 첨삭을 들어 주겠노라고 수차례 다짐을 한 상태였다.

그랬는데도 강의를 하는 기자가 내 글을 보고 ‘잘난 체한다’며 ‘어려운 말을 쓰는 글이 잘 쓴 글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니냐’고 훈계하자 나는 저널리즘을 혐오하게 되었다. 내가 쓴 말은 특별히 어렵거나 현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정도가 ‘현학’으로 느껴진다면 그건 첨삭자의 문해력이나 지적 수준이 지나치게 저급한 탓이 아닐까. 애당초 언론사에 들어가려는 주제에 대단한 아카데미즘이나 문장미학을 추구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기성 언론인들이 원하는 부류의 글쓰기가 얼마나 한심한 것인지를 잘 알게 되었다. 그야말로 안전하고 무해하며 원만하고 무난한, 밋밋하기 짝이 없는 글, 자기들 기준에서 적당히 내려다보며 부담 없이 이런 저런 훈계를 할 수 있는 (특히 작문은 청년다운 귀여운 감성을 버무리면 더 좋다) 글을 나한테 요구했다. 그런 것은 글이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아양을 떨어줄 의향이 없었다. 그런 것이 저널리즘이라면, 언론사에 안 들어가고 말지, 나는 글쓰기에 있어 그런 타협은 해줄 수 없다.

‘중2 수준의 독자’를 가정하고 ‘무조건 쉽고 짧게 쓰는’ 것이 좋은 글쓰기라는 것이 세간에 퍼져 있는 글쓰기 미신인데, 나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쉽고 짧은 글만이 좋은 것이라고 믿으며 그런 것만 쓰면 생각과 인생 자체가 유치해질 것이다. 그런 인생을 살 것이라면 굳이 머리 아프게 글은 왜 쓰는가? 내가 보기엔 문장의 길이는 부차적인 것이고, 가급적 ‘어렵고 복잡한 내용’을 ‘정확하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사와 사람의 일이 어렵고 복잡하여 이해가 어려운데, 그 모든 것을 단지 쉽고 짧고 ‘이해하기 쉽게’ 쓰는 것만이 능사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글쓰기에 대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글 쓰는 인간이 되겠다는 결심이란 곧 어렵고 복잡한 무언가와 기꺼이 마주하겠다는 결심에 다름아니다.

나야말로 ‘글쓰기의 본질’ 같은 것에 대해 논하기엔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지만. 그래도 바보 같은 글을 잘 썼다고 돌려 읽고 다니는 것만큼은 심히 잘못된 일이라고, 누군가는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4.

보통 글을 잘 쓰고 싶어서 목매는 청년들은 작가지망생들인데, 나는 별로 그렇지는 않다. 내가 잘 쓰고 싶어하는 글은 문학적인 글은 아니다. 문학을 사랑하지만, 그런 것을 잘 쓸 능력이 내게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글쓰기를 ‘남들보다 잘’하고 싶다고 했을 때,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잘’의 핵심은 정확함과 깊이다. 위대한 문학은 정확함과 깊이를 갖추고 있지만, 정확함과 깊이를 문학의 형식으로 구현할 수 있는 이들은 문인들 가운데서도 극소수의 대가들 뿐이다. 많은 내 또래의 문학지망생들은 야트막한 감상을 부정확하게 널브러뜨려 놓는 것을 문학이라고 착각하고 그 방면으로 부단히도 노력하는데, 미안한 얘기지만 그건 독자와 필자 모두에게 상당히 민망한 일이다. 나는 제대로 된 문학을 할 능력이 없으므로 아예 시도하지 않는다.

대략 2000년대에서 2010년대 초반 사이에 유행했던 ‘비평 글쓰기’에 대해서도, 과거에는 퍽 흠모하는 편이었으나, 요즘은 그렇지 않다. ‘비평 글쓰기’란, 말하자면 ‘논객의 글쓰기’인데, 주로 현대철학자들을 자유자재로 (실은 부정확하고 투박하게) 인용해가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해 매우 신랄하게 논평하는 공격적인 스타일의 글쓰기를 말한다. 초창기 인터넷 문화를 타고 한국사회의 대중정치문화를 선도했던 유형의 글쓰기로, 나보다 살짝 윗세대에게는 꽤 익숙한 유형의 글쓰기다. 정성일이나 허문영의 영화비평도 보기에 따라 그 범위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가령 그들은 김기덕과 홍상수와 존 포드를 지지하기 위해 전투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요즘도 씨네21에서는 이론비평과 작품비평 부문으로 나누어 영화평론상 공모전을 하던데, 한때 그런 글쓰기에 애정과 미련을 가졌던 사람으로서 꾸준히 살펴보고는 있으나, 그런 비평적 글쓰기의 소비자와 공급자가 모두 사라져가는 상황 속에서 늘 무기력 해질 뿐이다. 그런 방식의 글쓰기는 이제 한예종 영상이론과에서만 취급하거나,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같은 곳에서 ‘문화연구’라는 분과의 이름을 달고 대학 시스템 안으로 편입된 듯하다. 문제는 그 비평 글쓰기라는 것이 본질 상 아카데미즘과 잘 어울리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지금의 비평은 비평 글쓰기와 학술적 글쓰기 사이에서 대단히 어중간해졌다는 사실이다.

비평 글쓰기는 중요하고 필요한 유형의 글쓰기이고, 한때는 그것이야말로 글쓰기의 첨단이 아닌가 생각하며 흉내 내보려고 애도 써봤지만, 더 이상 나는 그것에 매혹되지 않는다. 혹은, 내가 ‘남들보다 잘’하고 싶은 글쓰기가 그런 글쓰기인 것은 아니다.

 

5.

최상급의 문학이나 정돈된 학술적 글쓰기만이 ‘정확’하게 내가 추구하는 수준의 ‘깊이’에 다다를 수 있다. 그런데 문학은 할 능력이 없으니, 결국 담백한 아카데미즘이 내가 추구하는 스타일의 글쓰기에 가장 가까운 듯하다. 담백하되 밋밋하지는 않고, 균형감각을 갖추되 절충적이거나 타협적이지는 않은 학술적 글쓰기! 거기서 오는 지적 긴장감이야말로 삶의 활력이며, 나는 인생에 의미라는 게 있다면 그것으로부터만 취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그것을 지금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고, 그것을 지향점으로 삼고자 한다는 의미다. 학술적 글쓰기를 하자면 ‘다작’이나 ‘다상량’ 이전에 압도적인 ‘다독’을 통한 절대적 박식함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문제는 나에게 제대로 된 연구서를 읽을 상황과 여건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냥 ‘닥치고’ 읽기 시작하면 되긴 하지만, 글쎄, 여러가지 사회경제적, 실존주의적 부대상황 속에서 그것이 여러모로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결국 내가 우울하고 무기력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한번 뿐인 인생인데, 좋은 글을 쓰는 것은 둘째 치고, 그 좋은 책들을 언젠가는 읽을 수 있어야 할 텐데.

 

6.

글쓰기의 비책이라는 다독 – 다작 – 다상량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해본 사람으로서 내친 김에 더 말해보자면, 나는 세 가지를 균형 있게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중에서도 다독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작’을 편식한 사람의 글은 현란하고 유려하지만 알맹이가 없어 공허하다. 언론 글쓰기나 아마추어 에세이스트들의 글이 전형적인 다작주의자의 글이다. 이들에게 글은 ‘기술’이다. ‘그런가 보다’하며 편하게 읽어 내려가긴 좋지만, 읽다 보면 글쓴이의 한계도 고스란히 느끼게 된다. 기술적으로 유려하게 써내는 것에 집착한 나머지,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피상적이고 ‘안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상량’에 몰두하는 사람의 글은 반대로 너무 힘을 주고 쓴 티가 나는데, 그런 것 치고 읽고나서 건질 것은 별로 없다. 다상량주의자들은 대부분 일종의 비평적 글쓰기를 추구하는데, 서투르게 그걸 따라했다간 나중에 ‘흑역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들의 좋지 않은 습관은 넘겨짚기, 성급한 유비추론의 폭주, 맥락 없는 인용 등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겉멋’에 젖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 쉬운 것이 바로 다상량주의자들의 글이다.

반면 다독주의자의 글, 즉 박식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의 글은 최소한의 ‘하방’이 보장된다. 앞선 두 유형의 공통점은 결국 ‘지식’이 얄팍하다는 것이다. ‘지식’의 절대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제아무리 기교를 부리고, 고민을 많이 해봐야 그 글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소 투박하고, 대단히 저돌적이지는 않더라도, 박식한 저자의 글은 거의 언제나 일정한 일독의 가치를 지닌다. 결국 다독과 박식함(지식)이야말로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조건이며 기본기다. 그런 것 없이 ‘글을 써보겠다’는 것은 만용이다.

그러니 남들보다 글을 더 잘 쓰려면 일단 남들보다 더 많이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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