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메모]『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사무라이들』 - 박훈

메이지 유신은 의외로 공부하기가 복잡하다. 일본의 ‘근세’ 시기가 워낙 특이하기 때문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세워진 에도 막부는 (당연하지만) 유럽적인 의미의 절대왕정 국가가 아니었다. 봉건제 하의 번(제후국)들은 생각보다 독립성을 강하게 띄고 있었기 때문에, 번끼리도 입장이 상이했다. 거기다 막말기에는 막부 이외에 천황까지 하나의 정치적 행위자로 등장하므로 이 시대의 ‘등장인물’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넷이다(번1, 번2, 막부, 천황). 동시에 에도 말기는 도시와 상공업이 발달했고,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유학 공부가 유행하던 특이한 시기였다. 이 책은 이처럼 복합적인 막말 기 정치서술을 네 명의 사무라이(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의 일대기로 접근하면서 논의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 피해간다.

 

요시다 쇼인(1830~1859)은 요즘으로 치면 지역 사교육 학원 원장이었다. ‘송하촌숙’이라는 학교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조슈 번에 막부타도와 존왕양이라는 ‘불온한 사상’을 퍼뜨린 장본인이다. 요시다 쇼인의 ‘초망굴기론’은 천황 앞에 만민은 평등하므로, 번과 신분제를 뛰어넘어 연합하여 막부를 무너뜨리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29세에 처형당했기 때문에 후대에 재소환되어 추앙받는 것에 비해서는 이렇다할 역할이 없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이후에 등장하는, 조슈 번의 ‘대단하다’싶은 ‘양이 폭주’를 보면, 요시다 쇼인이 제공한 사상적인 토대가 대단히 강렬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요시다 쇼인이 어둡고 강렬한 이미지라면, 사카모토 료마(1836~1867)는 막말기 인물로는 드물게 ‘밝고 명랑한’ 이미지이다. 이는 일정 부분 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영향이겠으나, 료마는 실제로도 동분서주하며 메이지 유신의 주요 대목에서 협상가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낙천적이고 타협적인 자세를 취했었다. 오늘날까지도 일본이 팽창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제스처를 취할 때 인용하는 것이 요시다 쇼인이라면, 세계주의적이고 외교적인 제스처를 취할 때 인용하는 것은 사카모토 료마이다.

 

모든 일이 시작된 것은 1853년의 쿠로후네(흑선 내항) 사건이었다. 막부가 개항에 대해서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자 이에 반발한 주요 번(대표적인 것이 조슈 번)들은 막부타도와 존왕양이를 내걸고 당시의 천황인 고메이 천황을 부추긴다. 고메이 천황은 통상조약 칙허를 거부하고, 막부 측에 양이를 요구하기도 했으나, 번들이 양이를 실제로 시행할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 막부 측의 이이 나오스케는 존양파에 대해 탄압정책(안세이 대옥)으로 맞대응하다가 암살당하고, 조슈 번은 더욱 더 폭주해서 실제로 프랑스 함대를 포격하며 양이를 실천에 옮기게 된다(시모노세키 전쟁, 1863). 물론 조슈 번은 패배했고, 조정에서도 공무합체파의 8.18 정변(분큐정변, 1863)으로 실권을 잃어버렸다. 그러자 조슈 번은 아예 천황을 상대로 쿠데타를 시도한다(금문의 변, 1864). 이 일로 조슈 번은 조정의 적(조적)이 되었고, 막부는 1차 조슈정벌을 단행한다. 이때 막부군의 지도자였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중재를 통해 전투 없이 상황을 종결했다. 조슈에서는 내부 쿠데타가 일어나서 강경파인 다카스키 신사쿠가 권력을 잡았다. 다카스키 신사쿠가 이끄는 조슈 군은 막부의 2차 조슈정벌을 막아낸다. 당시 일본에서 막부를 제외한 최대 세력은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이었기 때문에, 막부 타도를 위해선 두 번의 동맹이 필요했다. 이 과정을 주도했던 것이 사카모토 료마였다. 료마가 성사시킨 삿초동맹으로 사쓰마 번은 2차 조슈정벌 때 정벌에 참여하지 않았고, 이것이 조슈 번의 승리의 한 계기가 되었다.

 

막부 편에 섰던 고메이 천황이 급사하고, 삿초동맹의 압박을 받기 시작한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천황에게 실권을 넘기겠다는 ‘대정봉환’(1867)을 단행한다. 물론 이것은 고도의 정치적 결정이었다. 막부가 대정봉환을 단행하면, 삿초동맹이 막부를 칠 명분도 사라지고, 황제 치하에서 결국 실권은 다시 막부가 장악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막부의 속셈을 알고 있던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는 왕정복고 쿠데타(1867)를 단행, 막부로 출병한다. 그리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막부 측의 가쓰 가이슈(일본 해군의 아버지 – 막부측 가신이었음에도 상당히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다)와 협상 끝에 무혈로 막부를 무너뜨린다. 비로소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 것이다. 막말 기 일본 정치사에서 흥미로운 것은 의외로 외세의 개입이 적었다는 사실이다. 조슈 정벌때나, 왕정복고 쿠데타 때나, 마음만 먹으면 외세를 개입시킬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고 협상으로 사건이 종결된 경우가 적지 않다. 결과적으로 무진전쟁(막부 잔당과 메이지 정부의 전쟁) 같은 국지전은 있었지만 대규모의 내전은 없었다.

 

메이지 정부는 폐번치현과 판적봉환으로 중앙집권화를 단행하는 한편, 이와쿠라 사절단을 구성해서 서양의 문물을 배우러 떠난다. 오쿠보 도시미치(1830~1878)가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떠나 있는 동안 일본에서 사이고 다카모리(1828~1877)는 급격한 근대화로 불만이 누적된 사무라이들을 대변하며 ‘정한론’을 펼쳤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사쓰마 번 출신으로서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 그리고 조슈 번의 기도 다카요시는 흔히 ‘유신삼걸’이라고 불린다), 메이지 정부의 방향에도 큰 틀에서 공감했으나, 개혁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사무라이들에게 좀 더 동정적이었다. 사이고는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조선과의 전쟁을 통해 해소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쿠보는 정한론이 시기상조라며 반대했고, 사이고는 결국 봉기한다(서남전쟁, 1877). 사이고 다카모리는 유신 정부의 반역자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른바 ‘라스트 사무라이’로 흔히 우상화 되는 역사적 인물이다. 급진적인 서구화, 근대화가 동반하는 복고적인 열망을 대변해주는 인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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