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메모]『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 - 이영채, 한홍구

1) 메이지 유신에서 군국주의까지, 일본 우익의 기원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하는데 까지가 일본 근현대사의 제1막이라면, 이후 내각이 군부에 의해 장악되고 군국주의국가로서 대외팽창에 나서게 되는 것은 제2막이다. 1막의 주요 인물들로 조슈 번 출신의 다카스키 신사쿠, 기도 다카요시, 오무라 마스지로, 사쓰마 번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를 들 수 있다.

 

내각이 군부에 의해 장악되었던 중요한 제도적 요인은 일본 특유의 현역무관제였다. 보통의 국가들에서 국방부 장관은 민간인이 하도록 되어 있는 것에 반해, 일본은 ‘육군의 아버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세운 현역무관제 원칙에 따라 내각의 구성원인 육군 대신과 해군 대신을 현역 군인이 맡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군에서 후보를 내지 않으면 내각은 자동으로 붕괴하게 되어있었고, 이것이 1920년대의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뒤로 하고 일본에서 군부가 폭주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결국 해군 장교들이 현직 총리를 암살한 5.15 사건과 육군 황도파의 청년장교들이 벌인 2.26 쿠데타를 기점으로 통제파의 1인자였던 도조 히데키가 총리 자리에 오르면서 일본은 완전히 군국주의화 된다. (2.26 쿠데타의 사상적 대부였던 기타 잇키는 사회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였는데, 천황신앙에 반대하면서도 천황 자체는 도구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독특한 사상가였다. 이 황도파 멘털리티와 기시 노부스케의 만주국 설계는 박정희의 중요한 정치적 준거였던 것으로 파악되곤 한다.)

 

일본은 공식라인이 아니라 비선을 통한 흑막정치가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데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도야마 미쓰루가 조직한 국수주의 우익단체였던 '겐요샤'와 그 별동대 격인 '흑룡회'는 19세기말~20세기초 한국정치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겐요샤는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했고, 흑룡회는 김옥균과 동학당을 지원하거나 일진회를 움직여 한일합방 청원운동을 벌였으며, 쑨원을 지원하는 등 중국혁명에도 영향을 끼쳤다. 일진회는 원래 친일매국조직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으나 스탠포드 대학교 문유미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을 기점으로 복잡한 성격을 지닌 대중 조직이었다는 사실이 부각되었다. 일진회는 대한제국 시기의 친일파 또는 반민족행위자를 감별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소설 <불모지대>의 주인공인 이토추 상사의 세지마 류조는 박정희 시대 한일협정과 수출주도 경제정책을 자문했고, 전두환의 3S 정책과 서울올림픽 유치와 한일회담(전두환-나카소네), 노태우의 보수대연합을 조언하는 등 한일관계의 막후실력자로 유명하다. 이 책은 박정희의 친일은 결국 정신적인 차원이었음을 강조한다(박정희는 친일을 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했지만 준비가 끝나자 해방이 되어버렸다!).

 

2) 일본 시민사회의 기원

 

전후 일본의 사회운동은 좌익성향이 짙었고 철저한 평화주의 노선을 걸었음에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과 식민지 국가에 대한 보상 논의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가령 일본 시민사회는 70년대~80년대에 한국 독재정권의 인권탄압 사건들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면서도 그 기원을 일본의 식민통치와 군국주의 유산으로 소급하여 인식하지는 못했다. 일본 좌파가 주로 일본사회 내부의 독점자본주의 해체와 미국의 식민지화 반대 등의 문제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일본 공산당의 약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 공산당은 전후에 GHQ 치하에서도 평화혁명을 통해 공산주의 구현이 가능하다고 본 소감파(노사카 산조)와, 이를 비판한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의 입장을 받아들인 국제파(미야모토 겐지)로 분열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피의 메이데이 사건(1952)과 레드 퍼지(Red Purge)를 경험하며 위기에 빠진 공산당은 결국 반미무장투쟁 노선을 포기한다(1955년, 육전협). 그러나 여전히 무장투쟁 노선을 포기하지 않은 학생운동 진영은 60년대 전학련(안보투쟁)과 70년대 전공투를 통해 폭력시위를 이어간다. 전학련의 분트 중 적군파는 요도호 납치사건(1970), 텔아비브 총기난사(1972), 아사마 산장 사건(1972)을 벌이며 일본의 사회운동이 일반 시민의 상식과 완전히 유리되어 궤멸되어 버리는데 일조했다.

 

일본 시민운동의 새로운 흐름은 비슷한 시기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베평련)을 통해 모색해볼 수 있다. 베평련의 후신인 아시아태평양자료센터(PARC)는 일본 시민운동의 건강한 특성들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무조직, 무강령 원칙 하에 자유롭게 조직하고 해체하며, 일반 시민의 생활과 밀착된 일상적인 문제를 다룰 뿐 아니라 아시아 연대 및 일본의 전쟁책임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 향후 한일 시민연대를 기대하게 한다. 그러니까 현대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사회세력의 기원은 좌익 학생운동이 아니라 베평련에 있는 것이다.

 

3) 한일 관계와 일본 우익: 야스쿠니, 위안부, 재일 조선인, 식민지 근대화론

 

한일관계에서 쟁점이 되는 문제들로는 야스쿠니 신사 문제, 위안부 문제, 재일 조선인 문제, 친일과 반일 논쟁을 들 수 있다.

 

먼저 앞의 두 문제는 보다 세계주의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A급 전범들이 합사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 참배하는 것은 일본의 전쟁범죄를 미화하는 것이라는 식의 비판은 문제를 단순화하는 것이다. 패전국의 군인을 어떻게 애도해야 할지의 문제로 확장하여 볼 필요가 있다. 근대국가 수립기에 국립묘지를 만들어 전사자를 추모하는 것은 민족주의적 애국심의 고취라는 측면에서 근대국가의 종교적 기원으로 흔히 언급된다(조지 L. 모스). 야스쿠니 신사 같은 경우도 전후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이데올로기 정치로 승화한 한 사례라고 볼 수 있으며, 이는 국가나 사회가 죽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의 문제를 제기한다.

 

위안부 문제 역시 민족문제로 단순화 되어선 안 된다. 6.25 전쟁 때 ‘모포부대’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육군에 의해 설치된 ‘특수위안대’가 존재했다는 불편한 진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인신매매에 대한 팔레르모 의정서의 규정은 이 문제를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로 확대하여 이해하는 좋은 준거이다.

 

재일 조선인 문제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해방 이후 일본 땅에 남아있던 조선인들은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 공동으로 대응하게 위해 연합을 결성했는데, 주로 좌익성향을 띄었다(조총련). 성향이 다른 재일 조선인들은 ‘민단’을 구성했다. 민단의 초대 지도자는 독립운동가 박열이었지만, 초창기에는 주로 총련에 들어갈 수 없었던 친일 인사들이 많이 소속되어 있었다. 재일 조선인들은 샌프란시스코 협약 이후 일거에 일본국적을 박탈당했는데, 여기엔 전후 보상금을 아끼려는 일본 정부의 의도가 담겨있었다. 이후에 이들은 냉전 구도 속에서 북한(조총련)과 남한(민단)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했다. 초창기에는 조총련이 귀국(북송)운동을 주도했지만, 1965년 한일협정 이후에는 민단이 영주권 신청운동을 주도하면서 규모가 역전됐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일본에서도,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차별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어찌 보면 이들은 분단 이전에 나라를 떠났으므로 ‘조선 국적’의 ‘난민’이라고 할 수 있다. 인구감소 시대의 일본의 이민정책은 이들 재일조선인 문제를 기준으로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끝으로 한국 학계에서 오랫동안 벌어졌던 경제사 논쟁을 정리한다. 낙성대 연구소의 <반일종족주의>가 제기한 문제는 사실 아주 오래된 ‘내재적 발전론 대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에 다시 불을 붙인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한국의 사학계 및 재야의 지식인들은 다양한 지적 투쟁을 벌여왔다. 

 

식민사관에 대한 최초의 대응은 신채호-박은식의 민족주의 사관과 백남운의 사회경제사관이었고,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에는 김용섭(농경제사)과 강만길(상공업) 등이 식민사관에 맞서 자본주의 맹아론을 제시했다. 80년대에는 유명한 사회구성체 논쟁이 벌어진다. 박현채와 이대근의 창비 지면상의 공개논쟁을 통해 시작된 이 논쟁의 여파는 21세기 진보정당 내부에서 NL-PD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일련의 조선경제사 논쟁은 단일 학술논쟁으로는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력이 가장 큰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이제는 좀 낡은 구도의 논쟁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련하여 문유미 교수의 지적이 참고할 만하다("국내 한국 근대사 연구자들의 편협한 시야 탓에 세계 학계와 소통이 이뤄지지 않아 한국 근대사가 일본·청제국사의 하위 분야로 왜소화 될 우려에 빠졌다. 일본의 침략과 조선의 저항을 강조하는 민족주의 시각과 일본을 통한 자본주의적 제도의 도입에 초점을 두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협애한 논쟁 구도에 매몰됨으로써 개항기 조선과 한국 식민지화 과정에 대한 구미 학계의 주요 논점에 효과적인 대응을 못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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