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사 연구의 흐름과 쟁점(1)

* 이 글은 『역사학의 역사』(영국사학회, 2020)에 기초하여 작성되었다.

* 『역사학의 역사』는 ‘영국사 연구의 흐름과 쟁점’을 정리한 논문 모음집이다. 자잘한 오자들이 다소 아쉽지만 일반 독자 입장에서 접근성이 떨어지는 비교적 최신의 연구까지 망라하고 있어 유용하다.

 

1) 17-18세기: 잉글랜드 혁명(1642~1651), 명예혁명(1688), 산업혁명(1760~1830)에 대한 연구사 정리

- 잉글랜드 혁명(1642~1651)

찰스 1세와 의회의 충돌이 과열되어 벌어진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의 ‘내전’ 끝에 찰스 1세가 처형당하고 올리버 크롬웰이 ‘호국경(Lord Protector)’에 오르는 일련의 과정을 흔히 “청교도 혁명”이나 “영국혁명”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이 과정을 규정하는 어휘들은 특정한 사관을 전제하고 있어 용어 선택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청교도 혁명’은 국왕이 주도하는 국교회 및 가톨릭에 의한 청교도 탄압이라는 ‘종교적 분열’을 강조하는 표현이며, ‘영국내전’이라는 표현에는 기본적으로 잉글랜드 혁명 과정이 우발적이고 단기적인 ‘혼란’에 불과했다는 수정주의 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영국혁명’이라는 명명에는 이 시기를 스코틀랜드 혁명(1638) 및 아일랜드 반란(1641)을 포괄하는 ‘영국적인 맥락(British Context)’ 속에서 연속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새로운 영국사(New British History) 학파’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잉글랜드 혁명’이 보다 중립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휘그-맑스적 해석은 잉글랜드 혁명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으로, 잉글랜드 사회가 오랜 종교-정치적, 사회-경제적 분열을 겪고 있었음을 강조하여 혁명의 사회적, 필연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사무엘 가드너(Samuel Gardiner)와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은 각각 대표적인 휘그주의, 맑스주의 역사가로, 잉글랜드 혁명에 대한 전통적 입장을 대표한다. 가드너의 ‘청교도 혁명론’을 비판하면서 힐이 내세운 ‘시민혁명론’은 종교적인 분열 이상의 사회-경제적 갈등구조를 강조한다. 힐이 볼 때 잉글랜드 혁명은 봉건 귀족에 맞선 부르주아 계급(진보적인 젠트리와 시민 계급)의 ‘시민혁명’이었다. 그러나 실증적 연구들의 도전에 직면하자 힐은 ‘부르주아에 의한 시민혁명’이라는 관점을 완화하여 ‘청교도적 신념을 지닌 중간계급’을 혁명의 사회적 주체로 상정, 자신의 테제를 일부 수정하였다. 이때 힐에게 ‘청교도 윤리’는 베버(Max Weber)와 토니(R.H. Tawney)의 테제를 따라 ‘자본주의적 합리성과의 친연성’을 내포한 사회성 짙은 신념 체계였다. 이렇듯 힐의 관점은 잉글랜드 혁명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이라는 ‘진보적 과정’으로 이해한 휘그-맑스주의 사관의 대표이다.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이 관점을 비판하며, 잉글랜드 사회는 이렇다 할 사회경제적 갈등구조를 지니고 있지 않았고, 잉글랜드 혁명은 단지 종교적 문제로 인한 일시적 ‘내전’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이 시기 잉글랜드 사회가 지닌 종교적 균열구조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재조명된 것은 당대의 아르미니안주의(Arminianism)와 칼뱅주의의 갈등이다. 니콜라스 타이아케(Nicholas Tyacke)와 존 모릴(John Morrill)은 1630년대에 아르미니우스주의에 치우친 찰스 1세의 종교정책에 주목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칼뱅주의에 적대적이고 가톨릭과 유사한 종교의식을 강조하여 청교도 및 국교도들의 반발을 낳았고, 이것이 내전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수정주의자들에게 잉글랜드 혁명은 ‘최초의 시민혁명’이라기보다 ‘최후의 종교전쟁’에 가깝다.

새로운 영국사 학파(New British History)는 포칵(J.G.A. Pocock)의 제안을 따라 영국사를 “대서양 군도의 역사(History of Atlantic Archipelago)”이자 “세 문화(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간의 접촉과 관통의 역사”로 파악하고자 한다. 학자에 따라 여기서 더 나아가 영국사를 웨일스를 포함한 “네 문화”(Hugh Kearney), 혹은 스페인과 프랑스를 포함한 “다섯 왕국”(Jane Ohlmeyer)의 역사로 보려고 하는 등 영국사의 공간적 범위를 확장하기 위한 시도가 진행 중이다. ‘새로운 영국사 학파’에 의해 이전까지 영국사의 주변부로 여겨졌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역사가 재조명되고 있다. 이에 따라 스코틀랜드 의회와 찰스1세 사이의 전쟁이었던 주교전쟁(1639), 아일랜드에서의 얼스터 플랜테이션, 9년전쟁(1593~1603), 그리고 1641년 반란(1641) 등이 새로운 연구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콘래드 러셀(Conrad Russell), 존 모릴(John Morrill), 니콜라스 캐니(Nicholas Canny) 등이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 명예혁명(1688)

올리버 크롬웰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실각한 후 1660년에 왕당파(토리당)의 지지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고, 잉글랜드 혁명 때 처형당한 찰스1세의 두 아들 찰스2세와 제임스2세가 차례로 집권했다. 이들은 모두 아버지 찰스1세와 같은 왕권신수설의 옹호자이자 사실상의 가톨릭 신자였다. 정치적으로 영민했던 찰스 2세에 비해 ‘전제적이었던’ 제임스 2세는 의회와 자주 충돌했다. 제임스 2세가 왕자를 낳자, 가톨릭 신자 국왕이 탄생할 것을 우려한 의회는 제임스 2세의 사위였던 네덜란드 총독 오라녜 공 빌렘 3세(윌리엄 3세)를 불러들여 제임스 2세를 쫓아낸다. ‘잉글랜드 헌정을 회복하기 위해서 잉글랜드에 침공한’ 윌리엄 3세는 즉위 직후 ‘권리장전’을 통해 영국에 의회민주주의의 토대를 닦는다.

데이비드 흄(1778) - 토마스 매컬리(1848) - 트러벨리언(1938)으로 이어지는 ‘휘그 해석’은 명예혁명을 무능하고 반동적이었던 제임스 2세에 맞서 전 잉글랜드인이 타협정신을 발휘하여 이루어 낸 ‘분별 있는 혁명(Sensible Revolution)’이자 ‘성공적인 점진적 개혁’이었던 것으로 해석한다. 휘그당과 토리당의 타협과 화해가 잉글랜드인의 광범위한 혁명 지지를 불러왔고, 이것이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들에게 17세기 잉글랜드 역사는 ‘끝없는 진보의 역사’이자 ‘개신교 승리의 역사’였다.

수정주의자들은 제임스 2세를 재평가하고, 명예혁명을 일부 귀족의 쿠데타와 네덜란드의 침공으로 인한 왕조교체 사건이었던 것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혁명 300주년 논문집에서는 존 모릴과 조너선 이스라엘(Jonathan Israel) 등이 해석의 시야를 공간적으로 넓혀서 수정주의를 비판하고 다시 휘그 해석을 계승하고자 했다. 스티브 핀커스(Steve Pincus)의 2009년 저서 「1688: The First Modern Revolution」은 명예혁명의 사회경제적 영향을 중심으로 휘그주의와 수정주의 해석을 넘어서는 최근의 종합을 대표한다. 이에 따르면 명예혁명은 단순히 제임스 2세의 친가톨릭 정책에 대한 잉글랜드인의 단합된 종교적 저항이 아니라, 휘그와 토리의 갈등을 수반한, 세속적이고 정치경제적인 반응이었다. 명예혁명 이후 잉글랜드는 정치경제, 외교정책, 종교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면서 강력한 ‘근대국가’로 거듭났으므로, 명예혁명은 ‘최초의 근대혁명’에 값 한다.

 

-산업혁명

산업혁명은 1760년대부터 1830년대까지 영국에서 있었던 “공업생산의 증가와 이에 따른 경제사회적 변동”을 일컫는다. 사학 및 경제사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이 변동이 ‘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급격한 것이었는지를 두고 논쟁해왔다. 블랑키(Louis Auguste Blanqui), 엥겔스(Friedrich Engels), 토인비(Arnold Toynbee) 같은 전통적인 ‘격변론자’들은 기계의 지속적 사용과 공장제도 및 경쟁적 시장의 등장 등에 초점을 맞추어 산업혁명으로 인한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빨랐다고 주장해왔다. 1960년대의 근대화론과 경제성장사학 역시 산업혁명을 전통사회로부터 ‘이륙’하는 계기이자 근대화의 분기인 것으로 간주하여 격변론자들과 시각을 같이 했다. 한편, 신경제사(cliometrics)는 경제이론과 통계를 활용하여 당대의 거시경제를 재구성, 이전부터 제기되어온 격변론에 대한 의문에 힘을 실었다. 대표적으로 니콜라스 크래프츠(Nicholas Crafts)는 이 시기의 경제성장률과 소득증가율을 기존보다 낮게 추계하여 점진론의 근거를 제시했다.

역사학자 이영석은 산업혁명기의 지식인인 앤드류 유어(A. Ure), 에드워드 베인스(E. Baines),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의 저술로부터 ‘격변론’의 기원을 추적한다. 이들의 방적기에 대한 찬양은 당시 영국이 인도의 면직물 공업과 경쟁하고 있었던 상황 속에서 애국주의의 발로로 나타난 것이었다. ‘기계’ 자체는 영국에서 최초로 출현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방적기(작업기)가 동력기와 결합하여 ‘지속적인 기계의 사용’을 가능케한 것이 후대까지 유독 영국 산업혁명의 ‘혁명성’을 보증하는 것처럼 간주된 것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인도와의 경쟁의식 속에서 다소간의 편견을 가지고, 방적기를 강하게 예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애국주의적 기계 예찬이 맑스와 토인비를 거쳐 산업혁명에 대한 격변론적 시각을 만들어냈다고 이영석은 주장한다.

산업혁명의 ‘혁명성’에 대한 논쟁과 함께 산업혁명의 원인에 대해서도 오랜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 산업혁명이 왜 하필 영국에서 가장 먼저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안정적인 의회정치로 인한 정치적 안정과 국제무역 패권 장악, 중간계급의 성장, 금융혁명, 과학지식의 보급, 자유방임주의,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사유재산권과 계약법의 존재 등이 답변으로 제출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사실상 당대 영국사회의 모든 특징을 전부 산업혁명과 연결해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어, 포머란츠(Kenneth Pomeranz)(“지리적 행운”)나 크래프츠(“확률 상의 문제”)의 자조를 사기도 했다. 로버트 C. 앨런(Robert Carson Allen)의 “편향적 기술진보론(biased technological improvement)”과 조엘 모키르(Joel Mokyr)의 “성장의 문화론” 등은 기술혁신이 문화적, 제도적 요인과 결합한 결과 산업혁명이 가능했다는 최근 경제사학계의 관점을 대표한다.

 

2) 19세기 영국정치사: “하이 폴리틱스”

17세기 영국사가 대체로 스튜어트 조 말기의 정치적 격변에 주목한다면, 18-19세기 영국사는 루이스 네이미어(Lewis Namier) 이래로 하노버조의 ‘정치 지도자 열전’처럼 이해되어 왔다. 이것은 일찍이 양당정치가 자리잡은 영국에서 의회민주주의가 대중으로부터 유리된 ‘정치지도자의 통치’였다는 사실이나, 자국의 엘리트들에게 제국경영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려는 영국 대학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과 에드워드 파머 톰슨(E. P. Thompson) 같은 맑스주의적 사회사가들이 부상하면서, 이전의 ‘수뇌부 중심 정치사’는 매우 국지적이고 협소한 ‘정치행정의 역사’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1960년대말에 모리스 카울링(Maurice Cowling)을 중심으로 한 피터하우스 학파(Peterhouse School)는 여기에 맞서 정치 엘리트의 역사인 ‘하이 폴리틱스(High Politics)’를 다시한번 부활시키고자 하였다. 정치 엘리트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 이들의 접근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지나치게 단편적인 측면이 있지만, ‘토리주의 사관의 변형’으로서 영 제국의 전성기였던 팍스 브리타니카 시기 정치 엘리트에 대한 이해를 보충하는데 기여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오늘날 국제정치학에서 미국의 외교정책이 중요한 연구주제가 되는 것처럼, 19세기의 국제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당대의 패권 국가였던 영국의 외교정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 성립한 ‘빈 체제’에 대한 영국의 중립적인 입장은 이후 영국의 ‘제국경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흔히 이 시기 영국의 외교노선을 ‘찬란한 고립(Splendid Isolation)’이라고 일컫는데, 실질적으로는 군사적, 경제적 개입과 간섭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19세기 영국 고립정책의 기원은 ‘캐슬레이(Lord Castlereagh, Robert Stewart)’와 ‘조지 캐닝(George Canning)’이 펼친 외교정책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영국은 빈 체제의 일원이었음에도 에스파냐의 자유주의 반란(1820)과 그리스 독립운동(1821)에 대해 불간섭 원칙을 천명했는데, 이는 영국이 유럽 동맹체제와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영국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실질적인 간섭 의도를 내포한 것이었다. ‘파머스턴(Viscount Palmerston, Henry John Temple)’ 총리 역시 유럽의 세력균형을 위해 필요에 따라 국제관계에 개입했으며, 자유무역을 위해 중국을 상대로는 무력도 서슴지 않았다(2차 아편전쟁, 1856).

19세기 후반 영국 의회정치를 주도한 글래드스턴과 디즈데일리의 사상과 리더십, 개별정책에 대한 연구 역시 오래된 주제이다. 글래드스턴은 ‘자유주의의 화신’이자, 지미 카터를 연상시키는 도덕정치의 원조로서 ‘글래드스턴 자유주의’의 창시자이고, 디즈데일리는 ‘일국 보수주의’의 원조로서 영국 제국의 팽창정책의 주도자로 흔히 알려져 있다. ‘수뇌부정치학파’는 글래드스턴과 디즈데일리의 정치적 선택과 판단들을 일관된 정치적 신념의 반영이 아닌, 권력투쟁에서 이기기 위한 현실적인 술책의 결과물로 간주한다. 그 외에도 후대 영국 정치 구도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두 사람의 개인사, 심리, 종교관을 파고들어 글래드스턴과 디즈데일리를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인간으로 복원하고자 하는 다수의 전기가 19세기 후반 영국정치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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