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사 연구의 흐름과 쟁점(2)

* 이 글은 『역사학의 역사』(영국사학회, 2020)에 기초하여 작성되었다.

* 『역사학의 역사』는 ‘영국사 연구의 흐름과 쟁점’을 정리한 논문 모음집이다. 자잘한 오자들이 다소 아쉽지만 일반 독자 입장에서 접근성이 떨어지는 비교적 최신의 연구까지 망라하고 있어 유용하다.

 

3) 새로운 관점의 부상: 지성사, 여성사, 지구사, 군사사

-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

케임브리지 언어 맥락주의 학파의 ‘지성사’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이다 – 이 그룹에 속한 학자들은 고유한 전통과 역사를 가진 사료접근 철학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휘그주의 및 맑스주의 사관의 도식적, 자의적인 정치사상사 이해는 근본적으로 비역사적인 것이며, 과거의 문헌들은 당대의 정치적 논쟁 구도와 그것이 구성하는 언어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보다 타당한 관점이라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기존의 정치사상사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중요시되는 몇몇 정치철학적 개념들 – 예컨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 의 ‘맹아’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정전’과 그 저자들을 선별한 다음, 그들을 ‘자유주의의 승리’ 따위의 특정한 ‘거대 서사’ 속에 인위적으로 위치 지우는 방식으로 성립했었다. 지성사가들이 논박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인데, 과거의 ‘저자’들은 현대적인 의미의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에 대한 일말의 상상력도 없이, 단지 당대의 세계관과 논쟁 구도가 만들어낸 강력한 인식론적 제약 속에서 특수한 의도를 가지고 ‘발화’를 ‘수행’하고자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지성사는 “‘철학적 천재’들이 진공상태에서 발명해낸 초역사적인 개념의 연쇄”로서의 정치사상사를 탈-신비화하고자 한다. 적어도 분과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은 정치사상사에 접근하는 데 있어 그 측면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16~18세기 유럽의 정치사상 관련 사료는 전근대 유럽을 지배하다시피 했던 ‘공화주의적 세계관’의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독해해야 한다는 것이 케임브리지 언어 맥락주의 학파가 합의하고 있는 지점이다. 고전적인 공화주의 세계관은 한스 바론(Hans Baron)이 15세기 이탈리아의 자유도시들로부터 ‘시민적 휴머니즘’의 이념을 발견해내면서 복원된 세계관이다. 공화주의적 세계관에 따르면, 국가가 불확실한 운명(fortuna)의 장난과도 같은, ‘시간의 정치학’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랫동안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들이 타인에게 종속되지 않는, 자유롭고 덕성스러운 ‘시민’이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적 덕성의 기원을 가정(oikos)에서의 아내와 하인에 대한 지배 경험으로부터 찾았고, 마키아벨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한 시민군(militia)의 존재로부터 찾았다. 재산의 축적은 사치와 부패로 이어질 것이라는 마키아벨리의 의심 역시 공화주의 세계관의 중요한 요소이다.

포칵(J. G. A. Pocock)은 이러한 ‘덕 대 부패’의 인식을 비롯한 시민적 휴머니즘의 언어가 17세기 영국의 제임스 해링턴(James Harrington)으로 이어져 서양 정치사상의 중요한 기원을 이룬다고 보았다. 이때 포칵은 맥퍼슨(Crawford Brough Macpherson)이 해링턴을 ‘소유적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의 맥락에서 근대적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그로 해석한 것을 비판하고자 한다. 포칵에 따르면 해링턴이 「오세아나(Commonwealth of Oceana)」에서 ‘자유 토지 보유농’을 중시한 것은 그가 시장 지향적인 근대적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고전 고대적인 ‘공화주의’의 시각에서 봤을 때 봉토를 매개로 한 봉건적인 종속관계가 부패와 타락을 야기할 것이므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해링턴은 「오세아나」에서 봉건적인 ‘근대적 분별(modern prudence)’에 의한 통치가 공화주의적인 ‘고대적 분별(ancient prudence)’에 의한 통치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맥퍼슨은 홉스 – 해링턴 – 수평파 - 로크를 ‘소유적 개인주의’로 묶어서 이해한 반면, 포칵은 해링턴과 홉스를 대조시킨다. 홉스는 자연법 전통의 정치사상가로서, 권리와 의무의 법적 관계로 규정되는 ‘주권 국가(imperium)’를, 해링턴은 공화주의 전통의 정치사상가로서, 시민들의 정치적 실천을 통해 구성되는 ‘공화국(res publica)’을 상정하고 각자의 정치사상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포칵은, 맥퍼슨의 시대착오적인 ‘봉건 대 근대’의 도식을, ‘부패 대 덕성’이라는 공화주의의 구도로 수정하고자 한다.

‘신해링턴주의’를 신봉했던 체제 비판적인 ‘지방파’는 봉건법 자체를 거부했던 해링턴과 달리 영국의 ‘고래의 헌정(Ancient Constitution)’이 고전 고대적인 미덕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해링턴주의자들 역시 공화주의 언어의 구사자였다는 점에서 해링턴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가령, 1690년대 금융혁명 이후 새로운 형태의 재산소유와 공채발행을 통한 상비군의 설치가 발생하자, ‘지방파’는 공화주의적인 세계관에 근거하여 이것이 부패와 타락을 야기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궁정파’를 비판했다. 특히 뜨거웠던 것은 ‘상비군 논쟁’인데, 신해링턴주의자들이 시민적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볼 때 상비군을 두는 것은, 공화국의 구성원들이 스스로 무장하는 것을 포기하고, 공화국 수호의 책임을 전문화된 직업군인에게 위탁하여 덕성을 상실하고 전제군주의 지배를 당할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이때 전면화된 전인적인 고대의 인간과 전문화된 근대의 인간 사이의 대립은 18세기 정치논쟁의 또다른 중심을 이루었다.

이처럼 18세기 정치사상사는 명예혁명을 계기로 하여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단선적으로 발전하는 휘그-맑스적 도식과는 거리가 멀며, 아리스토텔레스-마키아벨리의 고전 고대적인 공화주의의 언어에 의해 근대적 상업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끊임없이 제약 받고 있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포칵은 이런 식으로 로크가 중심이 되는 18세기 정치사상사를 해체하고, 공화주의의 ‘덕성 대 부패’의 구도로 영미 정치사상사를 재구성한다. 이후 “18세기 서양 정치사상의 주류가 자유주의였다”는 비역사적인 신화에 대해 유사한 구도로 다양한 전선에서 지성사가들의 논박 작업이 이루어졌다. 도널드 윈치(Donald Winch)는 아담 스미스에 대한 애플비(Joyce Appleby)의 자유주의적 해석에 반발하면서, 『국부론』을 공화주의적 구도에서 상업의 문제를 다룬 책으로 재해석했다. 영국 내전기 푸트니 논쟁 때 수평파가 크롬웰과 마찬가지로 하층민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을 반대한 것은 그들이 모두 ‘소유적 개인주의’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맥퍼슨의 해석이었는데, 스키너(Quentin Skinner)는 하층민은 타인에게 종속되어 있어 자유롭고 덕성스러운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공화주의적 견해를 수평파와 크롬웰이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서로 동일한 입장을 보였던 것이라고 반박했다. 맥퍼슨의 이해와 달리 18세기까지 재산은 자유와 결부되어 이해되지 않았고(‘부’와 ‘덕성’의 대립), 재산은 단지 인격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만큼이면 충분한 것이었다.

퀜틴 스키너는 자신들의 방법론을 ‘화행론’ 및 ‘언어의 수행성’이라는 근사한 철학적 개념으로 체계화함으로써, 17~18세기 영국 정치사상사 연구에서 출발한 ‘지성사’의 적용 가능 영역을 획기적으로 넓혀 놓았다. (스키너가 비롤리, 페팃 같은 정치철학자들과 어울리면서 ‘신로마 공화주의’, ‘비지배 자유’ 운운하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자기 자신의 사료 접근 철학에 대한 배반이다. 예컨대 스키너가 영미 정치철학의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에 가담하면서 ‘신로마 공화주의의 비지배 자유야 말로 오늘날 권장되어야 할 형태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이 거부한 시대착오적 개념화를 반복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성사가들이 사료의 범위를 시간적, 공간적, 주제적으로 넓힌다면 논의는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유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간적으로는 19~20세기, 공간적으로는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주제적으로는 정치사상사 뿐 아니라 학술사, 철학사 등으로 확장하면 서구 지성의 역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완전히 새롭게 쓰일 수도 있다.

 

- 여성사(젠더사)

‘여성’을 사회학이나 문학비평이론이 아닌 ‘역사학’의 범주 내에서 다룬다고 했을 때, 선구적으로 섹스(sex)와 젠더(gender)를 역사화하여 이해한 토마스 라커(Thomas Laqueur)의 ‘한 성 모델(one-sex model)’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적절하다. 다양한 반론에 직면해 있지만, 라커에 따르면 근대 초기까지 남성과 여성의 신체는 생물학적으로 동일하다는 견해가 우세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남녀의 차이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이라기보다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었고, 18세기 말이 되어서야 ‘두 성 모델(two-sex model)’이 주류가 되면서 생물학적 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즉, 사회적 성인 ‘젠더’가 근대 자본주의의 구성물이라는 통념과는 상이하게, 근대사회가 전개되면서 생물학적 성인 ‘섹스’가 점차 중시되었다. 이 관점에서 중시되는 것은 근대의학의 발달과 함께 새롭게 떠오른 여성의 ‘신체’나 ‘체액’에 대한 인식의 역사이다.

한편, ‘빅토리아 시대(1837~1901)’로도 일컬어지는 19세기 영국은 산업사회가 자리잡고, 자유주의 사상과 대중정치가 확산되었으며, 도덕적 엄숙주의가 지배했던 시기로, ‘가정 이데올로기(Domestic Ideology)’, ‘분리 영역 이데올로기(separate-sphere ideology)’, ‘이상적 가정성’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면서 다양한 유형의 ‘페미니즘 운동’이 처음 등장한 시기인만큼, 여성사와 영국사의 접점은 다른 시기보다 ‘19세기’에 가장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서프러제트(suffragette)의 여성 참정권 운동은 19세기 여성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다. 리처드 에반스(Richard Evans)는 「The Feminist: Women’s Emancipation Movement, 1840-1920」(1977)에서 영국 페미니즘이 프랑스 혁명과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으로부터 연원하여,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해 이론화되고, 1850년대에 여성 참정권 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서사를 제시하여 영국 페미니즘의 흐름과 서술 범위를 구획했다. 해롤드 스미스(Harrold Smith)는 「The Women’s Suffrage Movement in Britain, 1866-1928」(1998)에서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 참정권 법안 제출(1866)에서 여성 참정권 획득(1928)까지를 서술 범위로 삼아 여성 참정권 운동의 구체적인 쟁점과 맥락을 개괄했다. 이외에도 당대 주요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의 업적과 사상에 대한 전기 형식의 연구서나, 중산층 이외의 노동계급, 농촌지역의 여성운동을 다룬 연구서가 다수 존재한다.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기존의 여성사에 19세기 영국 ‘제국’에서의 ‘인종’이라는 종축을 추가하는 것으로 발생하는 입체성이다. 19세기 영국 여성운동의 일부 조류는 ‘영국 제국의 백인 여성’이 식민국가의 토착민에 대해 갖는 인종적 우위에 기대어 참정권을 주장했다. 보어 전쟁(2차 남아프리카 전쟁, 1899~1902)은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으나 겉으로는 ‘열등한 백인인 보어인의 압제로부터 아프리카 토착민과 그곳에 있는 영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에이트란더, Uitlander)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특히 에이트란더의 참정권 문제가 결정적인 명분이었는데, 밀리센트 포셋(Millicent Fawcett)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프러제트들은 영국 여성과 남성 에이트란더들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자신들이 아프리카 토착민보다 인종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내세우는 백인우월주의에 의존하여 참정권을 주장했다. 몬테피오르(Dora Montefiore)와 같은 진보적인 서프러제트들은 아프리카의 토착민으로까지 참정권이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어디까지나 소수에 불과했다.

이 같은 분열은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더욱 심해진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유명한 페미니스트 집안인 팽크허스트 가문의 사례이다. 에멀린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와 그녀의 두 딸인 크리스타벨(Christabel Pankhurst)과 실비아(Sylvia Pankhurst)는 여성참정권 운동의 과격파인 여성사회정치연합(WSPU: 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을 결성했었는데,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자 에멀린과 첫째 딸인 크리스타벨은 즉각 전쟁을 지지하며 전쟁 중에 참정권 운동을 자제하는 것은 물론, 여성의 전시노동 참여를 촉구하는 등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전쟁에 대한 애국주의적 태도는 전쟁 전 이들의 시위에 등장하던 ‘제국의 꽃 수레(Car of Empire)’나 ‘잔 다르크 분장’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이었다. 반면 동생인 실비아는 언니와 어머니와 달리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서 전쟁과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면모를 보이며 1차 세계대전 이후 WSPU와 결별했다.

여성에게 보통선거권이 부여된 1928년 이후로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오스월드 모즐리(Sir Oswald Mosley)가 창설한 ‘영국 파시스트 연합(British Union of Fascists)’에 가입하며 아예 파시스트로 전향했다. 메리 리처드슨(Mary Richardson), 노라 엘럼(Norah Elam), 메리 앨렌(Mary Allen) 등은 의회민주주의를 비난하며, 파시스트 운동과 같은 직접 정치를 통해 여성참정권 운동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사실 WSPU는 이전부터 독재적으로 운영되었고, 민족주의, 영웅숭배, 낭만적 열정 등과 같은 파시즘적인 성격을 띄고 있어 여성운동과 파시스트 활동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었다.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이들에 맞서 ‘새로운 서프러제트 운동’을 통해 인종주의와 파시즘에 반대하고자 했다. 대표적으로 그녀는 영국 정부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승인하지 않도록 여론전을 펼쳤다(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은 2차 세계대전의 전조전이자 파시즘의 팽창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처럼 여성의 참정권이 19세기 영국 제국의 민족주의 및 파시즘과의 관계 속에서 옹호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페미니즘 운동 자체가 인종, 민족, 계급 등의 다른 사회적 범주와의 교차성 속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상기하는 듯하다.

 

- 지구사 (대서양사)

근대 국민국가는 ‘영토’와 ‘국경’으로 구획되어 있으므로, 전통적으로 역사학은 ‘육지’를 중심으로 한 일국사를 서술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국가‘들’간의 교류는 언제나 ‘바다’를 통해 이루어진 바, 서양에서 바다는 단순한 ‘통로’나 ‘경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공동의 활동 공간’이자 ‘근대 문명의 중심’으로서 흥미로운 서사의 대상이 된다. 서양 근대사에서 중요한 바다는 물론 지중해와 대서양이다. 페르낭 브로델의 아날학파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서양 근대의 사회경제사를 재구성했다면, 로버트 팔머(Robert Roswell Palmer)와 자크 고드쇼(Jacques Godechot)는 스케일을 키워 ‘대서양’을 중심으로 유럽대륙과 북아메리카를 잇는 서양 근대의 정치문화사를 재구성하고자 했다. 이들의 ‘대서양 혁명(Atlantic Revolution) 테제’는 미국과 프랑스의 ‘민주주의 혁명’이 모종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서구세계에서 자유의 확산’을 특권화 하였다. 여기에 버나드 베일린(Bernard Bailyn)이 가세하며 대서양사는 하나의 독립된 연구영역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게 된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냉전 질서가 서유럽과 미국을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동류 집단으로 묶을 동기를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20세기 말에 ‘세계화’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초국가적 연결’, ‘상호의존’, ‘네트워크’ 등을 중시하는 지구사(global history)의 관점에서 대서양사가 다시 주목받게 된다. 이때 ‘라틴아메리카’를 대서양사의 범위에 포함시키는 것은 ‘지구사’가 서구중심성을 탈피하기 위해서 중요하다. 다시 말해 ‘아이티 혁명’이나 ‘노예무역’ 같은 주제가 주목받는 것은 대서양을 무대로 하여 전개된 서양 근대사의 폭력성을 역사화하는 맥락에서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로 아이티 혁명은 프랑스사와 대서양사의 접점이고, 노예무역은 영국사와 대서양사의 접점이다.

영국은 18세기 노예무역을 주도한 국가인 동시에 노예제 폐지운동을 주도했던 국가였다. 에릭 윌리엄스(Eric Williams)나 시모어 드레서(Seymour Drescher) 등 기존의 노예무역 연구자들은 노예제가 폐지된 정치경제적 경위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런 관점은 노예제에 대한 반감 자체가 등장한 문화적 배경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반노예제 사상’이 18세기 초반 대서양 양안의 종교 지도자들이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형성된 ‘영미 복음주의 네트워크’ 속에서 싹텄다는 시각은 18세기 대서양 지성사를 풍부하게 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 관념의 변화와 정치적 행동 사이의 관계 모색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로운 연구영역을 열어젖힐 수 있을 것이다.

 

- 군사사(전쟁사)

인류가 글을 쓰기 훨씬 오래전부터 군대와 전쟁이 있었으므로 전쟁은 역사학의 가장 오래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고대의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중세의 베게티우스와 마키아벨리는 전근대 군사사의 대표이다. 절대왕정기에는 네덜란드의 마우리츠,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등 탁월한 전쟁군주가 다수 등장했음에도 이렇다 할 군사사 저술이 등장하지 않다가,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이후 클라우제비츠와 조미니가 전쟁의 개념과 보편적인 원리 등을 정리하여 군사학을 정립시켰다. 조미니의 영향 하에서 영국의 에드워드 크리시 경(Sir Edward Creasy)이 「Fifteen Decisive Battles of the World: from Marathon to Waterloo」(1850)에서 세계사의 향방을 바꾼 15번의 결정적 전투를 선별, 서구 국가의 단합된 국민성이 ‘악’을 물리치고 역사의 진보를 이끌었다는 유럽 중심적인 전쟁사관을 정립시켰다. 1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리델 하트, J. F. C. 풀러가 영국의 전투 수행과 전략전술을 연구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 전쟁 시기까지는 반전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어 전쟁에 대한 논의 자체가 축소되었고, 군사사 연구는 뒷전으로 밀려나야 했다.

마이클 하워드(Michael Howard)는 전쟁이 사회적 변화의 주된 동인이라는 관점에 섬으로써, 존 키건(John Keagan)은 전쟁 상황에서 일반 병사의 경험과 심리에 주목함으로써 군사사의 지평을 넓혔다. 하워드의 ‘전쟁과 사회 연구’와 키건의 ‘신군사사’를 통해 전쟁사는 역사학 내부의 다른 조류는 물론, 사회과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고고학 등 인접 분야와도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화약무기와 요새 진지의 등장과 같은 군사 기술상의 혁신이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군사혁명론’은 군사사를 일반역사 범주에 통합시키기 위한 좋은 통로가 되는데, 제프리 파커(Geoffrey Parker)는 군사혁명이 근대국가의 형성과 서구의 흥기의 원인이었다는 주장을 펴면서 그 작업을 수행했다. 군사혁명의 시기를 둘러싼 논쟁은 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에 의해 처음 제기된 ‘1560년대’를 기준으로 중세까지 더 앞당겨지거나(Clifford Rogers), ‘군사제도의 선진화’가 이루어진 18세기 중반까지 끌어내려지는 등(Jeremy Black) 90년대까지도 인기있는 주제였다.

그 외에도 한 국가의 전투 수행 스타일을 그 국가의 문화적 전통과 연계하여 이해하는 전략문화 연구(Hew Strachan, David French), 비서구 국가의 전쟁(Hew Strachan, Patrick Porter), 전쟁에 대한 기억과 기념 및 희생자 추모(Paul Fussell, Jay Winter) 등이 군사사의 주제로 떠오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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