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을 읽고

서양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결정적인 사건을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일 수밖에 없다. 프랑스 혁명은 서구 세계가 근대로 진입하는 데 있어 분기점이 되는 거대한 사건이었지만, 그 의미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에 대한 갑론을박의 역사가 길고 복잡했던 만큼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 프랑스”라는 시공간에 대해 섣불리 몇 마디 얹는 것은 만용이다. 중앙대학교 사학과 육영수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친근한 문체로 프랑스 혁명의 ‘이모저모’를 균형 있게 다루며 이 거대하고 육중한 사건에 대한 입문을 돕는다.

 

로베스피에르로부터 시작해서 1848년 혁명, 파리코뮌, 그리고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는 ‘혁명의 교리문답’을 구축하는 것이 프랑스 혁명에 대한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이다. 1789년에 시작되어 공포정치기에 절정을 찍고, 테르미도르 반동을 거친 뒤 나폴레옹 쿠데타로 끝났던 10년짜리 ‘사건’으로서의 프랑스 혁명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원조격으로 해석하는 ‘정통주의’의 계보는 소르본 대학의 “알베르 마티에즈 – 조르주 르페브르 – 알베르 소불 – 미셸 보벨”로 이어진다.

 

‘계급’에서 ‘문화’로 관점을 옮겨 프랑스 혁명에 대한 탈-마르크스주의적인 해석을 처음 시도한 것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버크와 토크빌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영국의 알프레드 코반이었고, 그것을 프랑스로 옮겨온 ‘수정주의의 대부’는 프랑수아 퓌레였다. 핵심은 공포정치가 혁명의 ‘자유주의적’ 기조로부터의 일탈이었으며, 교조적인 ‘진보적’ 해석’으로부터 벗어나 고찰해보면, 프랑스 혁명은 본질적으로 ‘혼란’과 ‘폭력’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퓌레는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이 주류였던 소르본 대학에는 입성하지 못하고, 아날학파의 근거지였던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총장자리에 만족해야 했다.

 

이후 프랑스 혁명을 기념물과 조각상에 주목하여 도상학적으로 재해석한 모리스 아귈롱과, 축제문화(세속종교)와 망탈리테(mentalité, 집단정신표상)에 주목한 모나 오주프에 의해 70년대부터 계속되던 ‘수정주의’ 해석은 미국으로 수출되기에 이른다. 퓌레류의 수정주의 해석을 미국 학계에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변주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린 헌트와 키스 베이커인데, 80년대부터 ‘일상정치문화’에 주목하며 프랑스 혁명을 새로이 해석한 이들은 ‘후기 수정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다.

 

이처럼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연구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논의 거리가 된다. 그리고 이런 특정한 사학사적인 관점이나 당대의 정치적 관심사는 대중문화를 통해 프랑스혁명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과정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가령, 20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아벨 강스의 영화 <나폴레옹>은 영화가 만들어졌던 제3공화정 말의 불안과 새로운 정치적 영웅의 등장에 대한 기대를 ‘나폴레옹’에 투영했고, 냉전 이후 만들어진 프랑스 혁명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로베스피에르보다 당통을 더 긍정적인 인물로 연출하는 것은 수정주의적 관점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프랑스 혁명에 ‘여성’, ‘노동’, ‘유색인’은 없었음을 지적하며 프랑스 혁명이 어디까지나 ‘백인 남성 부르주아’의 혁명에 불과했음을 상기한다. 여성들은 프랑스 혁명기 내내 자신의 권리를 대변해줄 세력을 찾아 지롱드파, 자코뱅파, 격앙파를 찾아 떠돌았지만 ‘수구적인 가톨릭에 우호적인 여성들’이라는 당대의 편견 탓에 혁명 내내 소외되었으며, 나폴레옹 시기에는 가부장적인 입법마저 이루어지게 된다. 메리쿠르와 올랭프 드 구즈와 같은 혁명기의 여성 영웅들을 ‘팜므파탈’쯤으로 폄하하고, 프랑스 혁명을 남성 정치인들의 ‘열전’ 정도로 그려내는 오늘날의 대중문화매체에도 이런 여성-배제적인 관점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이 남긴 불멸의 유산인 ‘인권선언문’은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개정이 시도되었지만) 무엇보다 ‘사유재산권’을 불가침의 권리로 못박은 선언문으로, 유산계급의 권리선언인 동시에, 무산계급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배제이기도 했다.

 

세계최초로 ‘노예들이 독립국가를 세운’ 아이티 혁명은 프랑스 혁명사 연구에 있어서 비교적 첨단에 놓인 분야이다.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생 도맹그에는 ‘백인 지주, 유색자유인(물라토), 흑인 노예’라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3개의 계층이 있었는데, 이들은 본토에서 벌어지고 있는 혁명을 지켜보며 각자의 권리 신장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본토에서는 진보적인 정치인들마저 노예해방 및 식민지 문제에 대해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다. 백인지주들이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흑인들을 괘씸하게 여기고 반동적 조치를 일삼자 흑인 반란이 일어났다. 본토에서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 (노예반란 진압에 동참해줄 것을 기대하고) 물라토에게 시민권을 주자, 백인지주들은 이에 반발하여 프랑스의 경쟁국이었던 영국-스페인 편에 서서 식민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본토의 혁명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노예제도 폐지를 선언했고(1793년), 흑인 혁명가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 혁명정부 편에 서서 영국을 격퇴한 후 나폴레옹 등장 이전까지 프랑스 공화정과의 연립정부를 이끌었다. 그리고 또다른 흑인 지도자 장 자크 데살린이 나폴레옹 정부에 맞서 최초의 흑인 독립국가인 아이티 공화국을 세우며 ‘아이티 혁명’을 완수한다(1804년). 이 놀랍고 위대한 혁명은 그러나 당대에나 오늘날에나 프랑스 혁명사 서술의 주변부에 머무르고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왕정복고기’를 한국정치사와 관련 지은 저자의 언급도 흥미롭다. 나폴레옹 이후 프랑스는 ‘루이 18세 10년, 샤를 10세 6년, 루이 필리프 18년(7월 왕정)’이라는 34년간의 왕정복고기를 겪게 되는데, 저자는 혁명기에 출생하여 왕정복고기에 청년기를 보낸 ‘1820년 세대’를 ‘한국의 386세대’에 빗댄다. 스탕달, 발자크, 빅토르 위고 같은 프랑스 문학의 위대한 작가들이 바로 이 세대의 인물들이다. 또한 19세기 초반인 이 시기야말로 오늘날과 유사한 의미의 ‘사회문제’가 대두되었던 시기이며, ‘사이비 평등왕’ 루이 필리프와 반동주의자 프랑수아 기조 총리에 맞서 최초의 근대적 노동운동(리옹쟁의, 1831)을 비롯한 다양한 반정부 시위 및 사회주의 운동(생시몽주의)이 성행했던 시기였다. 소설 레미제라블에 묘사된 투쟁 역시 이 시기에 있었던 소요를 다루고 있다. 10여년전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크게 흥행했던 것이 당시 박근혜 정부 등장에 대한 386세대의 반응이 아니었겠냐는 저자의 귀띔이 (장기적인 과정으로서의) 프랑스 혁명을 보다 생동감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만드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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