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 벡 외, <인플레이션>을 읽고

화폐의 역사를 다룬 책은 꽤 많다. 이 책은 그 중에서 독일에서 나온 버전이다. 중간중간 어색한 번역 탓인지 학술 교양서라기엔 저렴(?)하게 느껴지고(간혹 비문도 있다), 투자서라기엔 너무 학구적이다. 그런데 이제 보니 비슷한 주제의 책을 쓴 독일 저자들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확인된다. 아마도 독일이 20세기 초반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나라이자 두 번의 화폐개혁을 성공시킨 나라로서 이 문제와 인연이 깊어서 그런 것 같다.

 

[어색한 번역: 최고가 규정(66페이지) -> 최고가격제 /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체제(153페이지) -> 사회적 시장경제(질서 자유주의).  그리고 ‘금융정책’보다는 ‘통화정책’이 좀 더 일반적인 표현이다.]

 

경제학 교과서에 흔히 등장하듯이, 인플레이션이란 전반적인 물가수준의 지속적인 상승을 말한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더 잘 느낄 수 있는 것은 물가의 상승이라는 ‘표면’보다 화폐가치의 하락이라는 ‘이면’이다. 인플레이션은 ‘소리 없는 도둑’과 같아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내 지갑을 털어간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가만히 있는 내 돈의 가치(구매력)가 뚝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오늘 이 가격으로 살 수 있었던 재화를 내일은 같은 가격으로 살 수 없다. 따라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때엔 화폐보다 실물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유리하다. 그렇다면 인플레이션은 왜 발생하는가? 거시경제학의 가장 유명한(그나마 쓸모 있는) 방정식인 피셔방정식(화폐수량방정식)에 따르면 MV=PY이므로, 통화량이 늘어나면 물가도 상승하다. 화폐유통속도 V는 관습적으로 결정되어 있고, 고전적 이분성에 따라 화폐적 현상과 실물적 현상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없다고 가정한다면 통화량은 정확히 물가와 정비례 관계이다. 그리고 통화량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은 국가이다. ‘인플레이션이 언제나 화폐적 현상(프리드먼)’일지라도, 그 화폐적 현상이 역사적으로 늘 ‘정치적 현상’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통화정책의 중립성이나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신화로부터 벗어나 화폐시스템 자체를 정치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 최근 논의되는 암호화폐 이슈 역시 화폐의 탈중앙화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나름대로 해방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케인즈주의는 통화주의와 고전적 이분성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 케인즈주의자들에 따르면, 경제주체들은 단기에 실질가치보다 명목가치를 중시하는 화폐환상(money illusion)을 가지고 있다. 통화량이 증가하여 명목임금이 상승하면 노동자들은 실질임금이 상승한 것으로 간주하고 노동공급을 늘린다. 이것이 케인즈주의가 우상향하는 공급곡선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또한 케인즈주의자들은 이자율이 화폐시장에서 결정된다고 보고, 경제주체들이 이자율과 반비례하는 화폐수요를 갖는다고 본다. 통화량이 늘어나면 이자율이 떨어져서 투자가 촉진된다. 화폐적 현상이 실물부문에 영향을 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은 빚쟁이(채무자)에게 유리하다. 갚아야 할 명목상의 금액은 계약에 따라 정해지므로 시간이 지나도 동일한 반면, 계약 당사자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인플레이션 때문에 화폐가치가 하락한다면, 채무자 입장에서는 갚을 돈의 실질적인 가치가 줄어드니까 이득이다. 반대로 채권자는 받을 돈의 가치가 줄어드니까 손해를 본다. 이것이 인플레이션에 의한 부의 재분배 효과이다. 그런데 채무자가 발권력을 가진 국가라면 현저히 불공정한 상황이 벌어진다. 국가가 일단 빚을 왕창 진 다음, 돈을 잔뜩 찍어내 버린다면, 빚을 진 국가의 실질 부채는 감소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이 현대적인 의미의 ‘시뇨리지 효과’이다. 통화증발은 국가의 채무를, 화폐를 보유한 일반 국민에게 전가하는 결과를 야기하므로 이를 ‘인플레이션 조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구도를 세계적으로 확장하면 자연스럽게 미국의 달러패권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기축통화인 달러를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는 미국은 불공정한 특혜를 누리는 채무자로, 미국 이외의 모든 국가는 상대적으로 불리한 채권자로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은 봉건시대 영주(시뇨리지)처럼 부채(경상수지 적자)를 경감하기 위해 기축통화를 발권해버린다. 각국 화폐의 신뢰도는 그 국가의 외환보유고로 판단할 수 있는데, 미국이 달러 발권을 남발하면 외환보유액의 실질가치가 훼손된다. 인플레이션 조세 상황처럼, 그만큼의 가치는 미국이 가져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달러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위협받기 때문에 미국은 기축통화국으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실제로 금본위제도를 채택했던 브레턴우즈 체제는 1971년 닉슨쇼크로 미국이 일방적으로 금태환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트리핀 딜레마는 이 상황을 예견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미국이 기축통화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화폐가 처음 등장한 이래로 국가가 채무를 탕감하기 위해 화폐를 발행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 자주 목격되는 흔한 일이었다. 오늘날 ‘양적완화’라고 불리는 비전통적 통화정책 역시 중앙은행이 국가의 부채(국채)를 사들이는 것과 다름없으며, 이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국가 발권력에 의한 채무탕감’의 변종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양적완화란 ‘화폐발행을 통해 국가부채를 운용하는 눈속임’다. 단지 2008년 이후에는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디플레이션이 정책당국이 직면한 문제상황이 되었으며, 양적완화 정책은 일시적인 충격을 완화하는데 부분적인 효과를 보였을 뿐이다.

 

시선을 전근대로 돌려보아도 ‘화폐의 정치학’은 성립한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통화를 증발하기 위해서 주화의 금속 함유량을 줄이는 술수를 썼다. 전근대 사회에서 사용했던 화폐는 주로 금화나 은화였는데, 이는 지폐처럼 임의로 많이 만들어낼 수 없는 경화(hard currency)였기 때문에 주조차익을 크게 실현하기 위해서 국가는 저질 화폐(악화)를 양산해내는 방식을 쓴 것이다. 이 경우의 시뇨리지 효과는 상당히 직접적인 의미의 ‘주조차익’이다. 화폐가 물질성을 강하게 띄고 있어서 액면가치와 실질가치(돈을 만드는데 드는 비용)가 일치할 때는 별 탈이 없었지만, 화폐에 금이나 은이 아닌 싸구려 재료가 쓰이기 시작하면 악화에 의해 양화가 구축되기 시작한다(그레샴의 법칙). 경제주체들은 실제 거래에는 가급적 악화를 이용하려고 하고, 양화는 수중에 들고 있다가 해외로 팔아 넘기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디베이스먼트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3세기 로마, 14세기 유럽(쉰더링에), 16세기 스페인에서 발생했다.

 

인플레이션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변곡점은 지폐의 등장이었다. 금화든 은화든, 동전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녔던 반면, 지폐는 신뢰에 따른 보증증서 같은 것이었다. 존 로는 이 신용화폐(지폐)를 이용해서 프랑스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최초의 통화정책 실험을 벌인다. (존 로를 단순한 사기꾼으로 보거나, 이 시기 프랑스의 ‘미시시피 버블’을 단순히 탐욕스러운 시장의 광기 탓으로 보는 것은 이 사건의 일면만을 보는 것이다. 슘페터는 존 로를 탁월한 화폐이론가로 평가한다) 존 로는 통화량을 늘리는 것으로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본 최초의 경제이론가였다. 그의 계획은 3단계로 구별할 수 있다. 먼저 ‘뱅크 제너럴’을 세워 지폐를 발행하여(지폐였기 때문에 발권이 자유로웠다) 신용화폐 중심의 새로운 통화제도를 구축한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신용화폐를 실물(은)로 교환해달라고 요구하지만 않는다면 신용화폐체제에는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다음으로는 미시시피 회사를 설립해서 이 회사의 신대륙 개발이익을 담보로 주식을 발행한다. 이 주식은 오직 새로운 신용화폐로만 매입이 가능하다. 여러 요인으로 인해 미시시피 회사의 주가는 급등했고, 시민들은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을 사기 위해 국채를 팔아(국가에 의한 국채 회수) 자금을 마련했다. 뱅크 제너럴은 시민들이 필요로 한 만큼 통화량을 늘려 주었다. 국가는 이 주식매각대금으로 부채를 갚을 수 있었다. 1719년에는 미시시피 회사와 은행이 합병되었고, 결과적으로 국가의 부채를 회사의 주식과 맞바꾸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마지막 순서였다. 그러나 통화량 증가로 화폐가치가 떨어지자 시민들이 엄청나게 오른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을 실물로 교환하여 이익을 실현하려고 했고, 이들이 주식을 대량으로 매도하자 국가는 부족해진 현금을 다시 돈을 찍어서 메웠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재정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것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수반했으며, 미시시피 주식을 샀던 많은 사람들은 거의 모든 재산을 잃어야 했다. 국가와 회사, 은행이 구별되지 않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잣대로 엄밀하게 평가하긴 어렵지만, 통화량을 무분별하게 늘린 결과 인플레이션이 야기되었고, 국가는 부채를 탕감한 반면 채권자였던 일반 시민들에게는 손해가 전가되었다는 이야기의 구조는 아주 익숙하다.

 

국가의 과잉부채와 무분별한 화폐 발행은 20세기 초 독일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독일은 당시 전쟁배상금 등으로 엄청난 재정적자에 시달렸으며, 그걸 보전하기 위해 지폐를 발행하자 화폐가치가 0에 수렴하면서 끔찍한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경험했다. 독일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부동산을 담보로 한 렌텐마르크화를 도입하자 신기하게도 멈춰버렸다. 독일은 2차 대전 패전 이후에 또다시 화폐(라이히스마르크)가치가 폭락하여 화폐개혁이 불가피했다. 이는 패전이라는 외부변수 이외에도, 나치 정권이 전시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과도하게 늘렸던 통화량의 결과였다. 독일의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는 아데나워 총리의 경제장관으로서 다시 한번 화폐개혁에 성공한다. 라이히스마르크를 대체한 도이치마르크는 안정적인 화폐가치를 기반으로 1950년대 독일의 안정적인 사회적 시장경제(질서 자유주의) 체제를 이끌었다.

 

1960년대를 지배한 것은 케인즈주의 경제정책이었다. 케인즈주의의 세계관은 이런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 인지 경제주체들이 돈을 쥐고 소비를 하지 않는다. 돈 자체에 대한 선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유동성 선호). 그러면 기업이 가격을 내려서 재고를 어떻게든 팔아 치울 것 같은데 그러지 않고 생산량을 줄인다. 이것은 생산된 재화는 반드시 모두 소비된다는 세이의 법칙(‘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과 정면으로 반대된다. 물건이 소비되지 않으면 기업이 가격을 떨어뜨려서라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생산량을 줄여버린다는 것이다. 결과는 경기침체이다. 필립스 곡선 역시 케인즈주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해서 실질임금이 감소해도 노동자들은 이를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에 노동공급을 줄이지 않고, 기업은 같은 명목임금으로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다. 즉, 물가상승은 실업률을 떨어뜨린다. 이것은 고용을 증가시키려면 인플레이션을 유발해야 한다는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다. (통화주의자들의 해석은 거꾸로 적절한 실업률(자연실업률)이 유지되어야 물가가 안정된다는 것이다) 이 시기 독일에서 케인즈주의 경제정책을 주도했던 인물은 극우로 분류될 수 있는 거물정치인 기민당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키징어 총리의 재무장관)와 사민당의 경제부장관 카를 쉴러였다.

 

필립스 곡선을 비판한 경제학자로는 밀턴 프리드먼과 로버트 루카스가 있다.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노동자들은 곧 임금인상을 요구하게 되므로 기업이 고용을 늘리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루카스는 더 나아가서 노동자들이 인플레이션을 예상하고 선제적으로 임금인상을 요구할 것이므로 인플레이션은 오히려 고용 감소를 야기한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에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일어나며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함께 나타날 수 있다는 이 예언이 적중한다.

 

1980년대에는 세계 거시경제가 안정기에 접어든다(the great moderation, 이에 대한 다양한 설명으로는 https://www.federalreservehistory.org/essays/great-moderation 참고). 핵심은 중앙은행에 의한 엄격한 통화량 통제였다. 중앙은행의 신뢰에 기반한 안정적인 통화정책 운용은 2008년 금융위기 전까지 전세계 거시경제의 안정기를 주도했다. 그런데 통화정책의 목표 설정은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틴버겐의 법칙에 따르면 다수의 정책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같은 수만큼의 정책수단이 필요하다. 그런데 통화정책은 오늘날 물가라는 목적 이외에도 실업률, 금융안정 등 복수의 정책목표를 달성할 것을 요구당하고 있다. 양적완화 정책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한 정책이다. 양적완화 정책은 물가안정만을 목표로 한 정책이 아니다. 세계경제의 구조적 장기침체와 저금리 기조 속에서 디플레이션 충격을 어떻게든 완화해보기 위한 통화당국의 발악이다. 어찌 보면 정치인(재정정책)들의 직무유기의 결과 통화당국이 온갖 정책목표를 떠안은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국가는 인플레이션 게임의 승자인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플레이션이란 원리 상 채무자에게 유리한 게임이고, 이 채무자가 발권력을 동원해서 인플레이션을 조장할 수 있다면 이 게임은 채권자에게 완벽하게 불리한 게임이다. 음모론자들은 국가가 부채 경감을 위해 인플레이션을 조장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최근 전세계적인 양적완화 정책을 두고 ‘금융억압’이라고 표현하는 것에는 이런 의심이 내포되어 있다. 저금리 기조 속에서 국가는 저리로 국채를 발행할 수 있으므로 이자부담이 적고, 거기다 양적완화는 인플레이션을 야기해서 부채 경감 효과까지 추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통화정책의 경우 재정정책과 달리 민주적 통제 없이 전문가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된다. 통화증발을 통한 자국화폐의 평가절하는 해외부채에 대한 최고의 경감책이 되기도 한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바로 이런 화폐시스템의 정치화를 막기 위한 기제이지만, 현실적으로 중앙은행이 정치적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한편, 인플레이션과 장기성장률 사이에는 경험적으로 음의 상관관계가 성립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성장률이 낮으면 빈곤율도 높다. 인플레이션과 빈곤 사이의 상관관계는 대단히 복잡하지만, 이렇게 보면 인플레이션은 단기적으로는 빈곤을 완화시키고(필립스 곡선에서 물가상승에 따른 고용창출 효과), 장기적으로는 빈곤을 악화시킨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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