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적 완화란 무엇인가

양적완화는 아주 단순화하면 중앙은행이 민간 부실자산을 사줘서 민간은행들의 부도를 일단 막고 보는 것이다. 양적완화는 결과적으로 2008년 금융위기가 전세계적인 대공황으로 악화되지 않도록 하는데 기여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저자는 지난 10여년간의 양적완화는 ‘은행을 위한 양적완화’였을 뿐, ‘모두를 위한 양적완화’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중앙은행이 적극적으로 자산을 사줬지만, 이 돈을 받은 기업과 은행들은 생산적인 투자에 나서지 않고 자신들의 대차대조표를 개선하는데 집중했으며(디레버리징의 역설, 리처드 쿠의 ‘대차대조표 불황’ 이론), 자산가격은 지지되었지만 이것이 소비와 투자의 증대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지난 10여년간의 양적완화 ‘실험’은 기업과 은행의 부채를 탕감해줬을 뿐이고, 이들은 받은 돈으로 자산만 사 댔다. 부자들의 돈이 늘어나도 생산성(투자)은 향상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민간부채는 탕감되지 않았고 일반인들은 소비를 늘리지 않았다.

 

‘모두를 위한 양적완화’를 위해서는 돈을 뿌려 댈 헬리콥터를 ‘어디에’ 띄울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중앙은행과 재정당국의 정책공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근원적으로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1970년대적인 정책 패러다임으로부터 탈피할 것을 요청한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통한 거시경제의 완벽통제는 필립스 곡선이 우하향하던 시절의 ‘신화’에 불과하다. 오늘날 세계경제는 필립스 곡선이 ‘평탄화’되어 저성장과 저물가가 상수가 된 상황이다. 즉, 경제학 교과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바이마르 공화국이나 짐바브웨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걱정할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70년대적인 정책 신화에 발이 묶여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살포하는 동안 정부는 손을 놓고 있었다. 정부가 중앙은행과 협력하는 것이 통화정책의 독립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는 허상일 뿐이다 – 정부와 중앙은행의 경계는 이미 대단히 모호하다). 게다가 2009년에 하버드대학교 경제학자들(라인하트&로고프)이 정부부채가 GDP의 90%를 넘으면 경제적 재앙이 초래될 것이라는 주장을 담은 악명높은 ‘긴축주의’ 논문(재정건전성 신화)을 발표하자 각 국가의 재정당국은 아예 긴축재정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통화완화 와중에 유로존 국가들은 지출삭감과 세금인상으로 위기를 맞아야 했고, 일본 역시 때아닌 소비세 인상으로 회복되던 경기가 꺾이고 말았다.

 

늘어난 유동성은 이른바 ‘핫머니’가 되어 엉뚱하게도 개도국으로 흘러갔으며 이것은 애당초 장기적인 투자가 아니었으므로 신흥국 경제의 불확실성만 높이는 꼴이 되었다. 실제로 2013년에 버냉키의 테이퍼링 가능성 언급만으로 신흥국의 주가와 통화가치가 폭락하는 ‘테이퍼링 탠트럼(긴축 발작)’이 발생한 바 있다. 신흥국에 유입된 핫머니는 약간의 불확실성만으로도 엔화, 달러화 등 신뢰성이 높은 통화로 도망가버린다. 그러니 선진국 경제의 양적완화는 신흥국들에 대해서도 무책임했던 셈이다.

 

저자는 이처럼 중앙은행은 돈을 찍어낼 수만 있을 뿐이고, 그 돈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지 않도록 구체적으로 분배하는 것은 책임 있는 정부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10여년간의 양적완화는 결국 정부가 직무를 유기하고 모든 역할을 중앙은행에 전가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저자는 부채의 화폐화와 민간인의 중앙은행 계좌 증설(본원통화 직접공급)은 물론, 중앙은행에 대한 민주적 통제까지도 불사할 수 있다고 본다. 전근대 시대의 왕국들처럼 정부가 자기들 빚을 은행에서 찍은 돈으로 조달해가면서까지 자금을 흥청망청 쓸 것이라는 것(그래서 반드시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날 것)도 일종의 과대망상이라는 것. 지금 하이퍼인플레이션보다 더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디플레이션이다.

 

다시금 드는 의문은 수식이나 그래프의 차원이 아니라 실무의 차원에서 중앙은행의 통화완화와 정부의 지출증가가 ‘정말로’ 구별되는 것인지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사실상 구별 자체가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학부 거시경제학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런 괴리 때문이 아닌가 싶다. 대표적으로 중앙은행의 역할과 화폐공급에 대한 교과서 서술이 대단히 모호하고 이율배반적이다. 분명 IS-LM모형을 실컷 서술하다가 뒷부분에서는 천연덕스럽게 이자율 목표제와 테일러 준칙, 그리고 수평의 MP 직선을 소개한다. 로버트 루카스의 합리적기대가설을 배우며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배우지만 ‘비전통적 통화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양적완화도 배운다. 나의 문제인지 거시경제학 교과서들의 문제인지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교과서가 아닌 단행본과 경제기사들을 읽으며 실제 경제가 돌아가는 모습은 따로 학습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대학원에 가면 이 교과서들의 ‘뒷부분’(학부 수업에서 진도를 다 빼지 못한 부분)을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증명하는 과정을 거친다는데(아마도 미시경제학의 일반균형이론과 거시경제학의 DSGE 모형을 '증명'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써야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현실의 문제들을 바라보는 ‘밝은 눈’이 생길 것인지도 의문이다. 수학공부 하느라 현실은 뒷전이 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아주 훌륭하다. 얼마전부터 재정적자에 관대한 이른바 ‘진보적인’ 경제서적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 책도 그런 부류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분량이 짧고 내용은 친절하면서도 알차다. 다만 최근에는 세계경제에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있어 양적완화 정책 자체가 철회되는 상황이라 이 책의 주장이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최근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어디에서 찾는 것이 적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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