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준, <반도체 삼국지>를 읽고

미‧중 패권경쟁의 전선이 기술 및 산업 영역까지 번지면서 이제 국제정치에 대해 말하기 위해 반도체 제조기술까지 공부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책은 ‘경제안보’가 화두로 떠오른 최근의 국제정치적 맥락을 비교적 충실히 고려하면서 반도체 산업의 역사와 최근의 기술적 쟁점을 소개하고, 한국 반도체 산업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이 주식 투자자 독자를 염두에 둔 반도체 기술 관련 서적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다만 서술의 밀도가 균일하지 않고 구성도 그다지 유기적이지 않아서 단행본으로서의 완결성은 떨어지는 편이다.

 

1. 반도체 산업 주도권 이행: 미국에서 일본으로

역사적으로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은 미국(70년대), 일본(80년대 초‧중반), 한국과 대만(2000년대)으로 ‘서진’해왔다. 2010년대 이후로는 중국이 ‘반도체 굴기’ 기치 하에 그 주도권을 이어받으려고 하고, 미국은 공급망 전체를 재편함으로써 이에 맞서는 모양새다.

반도체는 제품수명주기가 짧은데다 거대 설비투자가 필요해서 신규기업의 진입이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다시 한국과 대만으로 이동해온 역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논의거리다. 특히 미국으로부터 주도권을 빼앗았다가 다시 한국과 대만에게 주도권을 내준 일본 반도체의 사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통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 이행 과정은 기업 간 출혈을 감수하는 경쟁적인 저가공세를 통한 ‘치킨 게임’으로 설명되곤 한다.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이 AMD, 마이크론, 인텔 같은 미국 기업으로부터 일본의 ‘반도체 5인방(NEC, 히타치, 미쓰비시, 후지쓰, 도시바)’으로 넘어오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최초의 ‘반도체 치킨 게임’ 결과였다. 일본은 정부(통산산업성, MITI)의 적극적인 산업육성 정책으로 자국 내에 수직계열화 된 독자적인 반도체 산업생태계를 구축하고 있었고, 이것에 기초하여 미국보다 높은 공정 수율과 품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일소현명’)으로 축적해온 기초과학 역량이 그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여기에 엔저 호재까지 겹쳐 일본 반도체는 막대한 자금력에 기초하여 기존의 강자들과 치킨 게임을 감내할 수 있었다.

미국은 일본 반도체의 약진을 ‘제2의 진주만 습격’이라고 부르며 USTR 제소(1985), 플라자 합의(1985), 미‧일 반도체 협정(1986)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견제했다. 여기에 일본 기업들의 기술적 오판들이 겹쳤다. 후지쓰는 NOR형 대 NAND형 사이의 갈림길에서 NOR형을 선택하는 오판을 범했고, 히타치는 트렌치형과 스택형 사이에서 트렌치형을 선택하는 오판을 범했으며, NEC는 램버스와 DDR 사이에서 램버스를 선택하는 오판을 범했다(삼성전자는 정확히 반대되는 선택 – NAND, 스택형, DDR – 을 한다). NEC, 히타치, 미쓰비시가 힘을 합쳐 세운 엘피다는 높은 수율을 유지하기 위해 고비용의 OSAT(검사 및 패키징 공정)에 집착하는 바람에 2000년대 치킨게임을 버텨내지 못하고 파산하고 만다.

이 기술적 오판들의 기저에는 기술적 완성도를 중시하는 일본 특유의 기업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기존의 기술을 과감히 포기하고 ‘파괴적 혁신 기술’을 도입하기 보다, 기존 기술의 완성도를 높여 ‘오버 스펙’ 제품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파괴적 혁신을 어렵게 하여 세대교체 주기가 짧은 반도체 제품 특성에 적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비자 입장에서는 가격 인상으로 인한 가성비 저하로 다가올 뿐이었다(20년 동안 고장 나지 않는 비싼 스마트폰을 상상해보면 이해가 쉽다. 2~3년 안으로 신제품이 나올 것이 뻔히 예상되는데 누가 이런 걸 사겠는가?). 일본의 이런 기업문화는 인사조직적으로는 개발 부서에 대한 우대로 나타난다. 제품 순환 주기가 짧은 반도체 같은 경우 시장의 요구 사항에 민감한 마케팅 부서의 의견이 더 중요할 수 있으며, 개발과 양산 부서를 분리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삼성 같은 경우 개발과 양산을 분리하지 않고, 연구개발과 마케팅 부서는 순환 배치하고 있다.

또한 일본 정부의 과도한 개입은 경영 효율화를 위한 사업 분리나 정리를 막아서 일본 기업들이 반도체 산업구조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게 했다. 80년대에는 반도체 산업구조가 ‘집약 소자 재조(IDM)’ 방식에서 ‘팹리스(설계)’와 ‘파운드리(생산)’로 분화되기 시작했는데, 일본은 기술 유출을 우려하여 해외 파운드리 기업에 생산 위탁을 불허하고, 정부가 주도하여 파운드리 회사를 새로 만들고자 하였다(국가 파운드리 신설 프로젝트). 그러나 일본 기업들끼리 이해관계가 어긋나 정부의 파운드리 프로젝트가 흐지부지 되면서 일본 기업들은 IDM 방식으로부터 재빨리 탈피하지 못했고, 이것이 효율성 저하로 이어졌다. 여기에 거시적인 경제위기(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08년 글로벌 금융위기, 11년 동일본 대지진)가 겹치면서 일본 반도체는 한국과 대만에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

2. 한국과 대만: 삼성전자와 TSMC                                     

한국의 삼성전자, 금성반도체, 현대전자는 팹리스와 파운드리로 분화되는 반도체 시장의 흐름 속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선택했다. 한국은 산-학-연-관 연합의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인 ‘초고집적 반도체 기술 공동개발사업’(1986)을 통해 메모리 반도체 기술 개발 속도전에 뛰어들었다.  삼성전자는 1996년 1Gb DRAM 개발에 세계최초로 성공하며 업계 지배를 확실히 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일본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1997년 외환위기를 틈타 한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견제를 시작했는데, 한국은 이에 선제적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이때 LG 반도체가 현대전자에 인수되었고(현대반도체 → 하이닉스 반도체), 하이닉스 반도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쳐 2011년 SK 그룹에 의해 인수되면서 SK 하이닉스가 되었다.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는 현재까지 마이크론과 함께 전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과점하고 있다.

한편, 대만의 TSMC는 파운드리에 집중하면서 급성장했다.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사훈에서 알 수 있듯, TSMC의 경쟁력은 순수하게 파운드리 부문에 집중함으로써 쌓은 고객과의 신뢰이다. 팹리스가 파운드리에 제조를 맡기게 되면 설계기술이 유출될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데, TSMC는 이 설계기술을 통해 독자적으로 칩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삼성전자의 경우 파운드리 사업부가 분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애플이나 퀄컴 같은 팹리스 기업이 삼성 파운드리에 제조를 맡기면 자사의 설계 기술이 경쟁사인 삼성에 노출될 것을 감수해야 한다(삼성전자는 2010년부터 파운드리 사업을 본격화하면서 TSMC와 경쟁하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시장 점유율은 TSMC의 1/3 정도다). TSMC는 이러한 신뢰에 기반하여 다양한 팹리스 업체들과 협력하고 있으며 맞춤형 공정 등을 제공하여 지속적으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TSMC의 막강한 영향력을 잘 표현해주는 말이 ‘슈퍼을’이다. 팹리스는 파운드리의 입장에서 고객사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파운드리가 ‘을’의 입장에 놓이게 되나, TSMC는 ‘을’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갑’의 위치(슈퍼을)를 점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파운드리 사업의 기술적 핵심은 초 미세 노광 공정이다. 반도체 회로의 집적도가 18개월에 2배씩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도 나노 수준에서는 한계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 기술적 난관을 타개할 대안이 바로 새로운 광원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DUV 방식으로 7나노 이하의 회로를 그리려면 멀티 패터닝 등 부가기술을 동원해야 하는데, EUV 광원을 사용하면 비용을 절감하면서 7나노 이하의 선단 공정을 구현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트랜지스터 구조도 기존의 핀펫(FinFET)에서 게이트-올-어라운드(GAA) 방식으로 바꿔야 하는데 삼성전자는 2023년부터 3나노 이하의 선단공정에 GAAFET을 활용할 예정이다. 파운드리의 기술적 핵심인 노광 공정에서 7나노 EUV 공정을 도입한 것은 TSMC와 삼성전자 뿐이기 때문에 삼성전자는 TSMC의 유일한 경쟁자가 된다. 그리고 이 EUV 노광장비를 유일하게 공급할 수 있는 또다른 ‘슈퍼을’ 기업은 네덜란드의 ASML이다.

 

3. 중국 반도체 굴기의 기술적 전망

중국 반도체 굴기의 전망도 바로 이 초미세 패터닝 기술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화웨이는 중국 공산당의 전폭적인 지원 및 낮은 임금을 통한 가격경쟁력의 확보에 더해 무차별적인 기술 IP(지적재산권) 침해를 통해 세계 통신장비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화웨이의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이 자체 모바일 AP(기린)나 CPU(쿤펑)를 설계하면 TSMC가 이것을 제조하여 납품하는 것이 중국의 반도체 공급 방식이었다. 그런데 2019년 트럼프의 화웨이 제재, 2020년 세컨더리 보이콧을 포함한 미국의 소재‧부품‧장비 기술 구매 금지 조치가 이어지며 이 공급망에 차질이 빚어졌다. 화웨이 사태 이후 TSMC는 화웨이에 대한 반도체칩 공급을 중단했으며, 삼성전자 등 다른 파운드리도 세컨더리 보이콧 때문에 화웨이에 반도체칩을 공급할 수 없다. 그렇다면 중국정부로서는 자국의 파운드리인 SMIC의 양산능력을 일단 확충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다.

그런데 SMIC의 기술력은 아직 14나노 수준에 머물러 있는데다, EUV 장비를 공급해줄 ASML 역시 세컨더리 보이콧의 영향력 하에 있어서 섣불리 중국에 노광장비를 공급해줄 수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하이실리콘의 설계 기술 역시 미국이 독점하고 있는 EDA(전자 설계 자동화 소프트웨어)에 기반하고 있어 중국은 독자적인 설계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없다. 결국 미국 주도의 대중국 반도체 봉쇄가 본격화될 경우, 중국이 자체 기술만으로 독자적인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은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난니완 프로젝트' - 가능한가?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직면한 한계는 중국 반도체가 기술 따라잡기 과정에서 선택한 발전 방식이 지니고 있던 문제점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중국은 기술 IP 탈취 뿐만 아니라 ‘천인 계획’이라는 이름의 국가 차원의 적극적인 인재 유치 정책을 통해 선도 기업 출신 엔지니어들의 암묵지(knowhow)에 의지하여 기술 격차를 줄여왔다. 대표적으로 SMIC는 TSMC 출신의 량멍쑹을 CEO로 영입함으로써 미세 패터닝 공정을 28나노에서 14나노로 급진전시킨 바 있다(첨단 기술에 대한 지식이 엔지니어의 암묵지 형태로 옮겨 다닌다는 것이 의외다). 이와 같은 따라하기 식 발전 방식은 미국의 대중국 봉쇄에 속수무책으로, 중국이 미국에 의존하지 않는 자체적인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의미로 천명한 ‘난니완 프로젝트’는 과도한 수사일 뿐임이 드러난다. 다만 중국이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해온 기초과학 연구는 유일한 변수다. 만약 중국이 양자컴퓨터와 같이 ‘게임 체인저’에 해당하는 기술을 먼저 개발한다면 전세는 역전될 수 있다.

최근 미국은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및 칩4 동맹 등을 통해 고도로 분업화되어 있는 현재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무너뜨리고 중국을 배제한 새로운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삼성전자와 TSMC가 각각 텍사스와 애리조나에 반도체 팹을 건설한 것 역시 미국의 ‘프렌드-쇼어링’을 통한 공급망 재편의 일환이다. 중국이 이 상황을 버티고 독자적인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면, 세상에는 완전히 다른(서로 호환되지 않는) 기술적 표준을 가진 2개의 반도체 ‘평행 세계’가 공존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일단 기술적으로 말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 양국 모두에게 막대한 비용(시장 축소)을 안길 것이며, 전 세계 모든 산업에 반도체가 필수재가 된 상황을 고려할 때 그 정도의 극단적인 기술적 분기는 없을 것으로 저자는 전망한다. 미국이 실제로 노리는 것은 ‘중국 반도체 시장의 고사보다는 중국의 차세대 반도체 기술 및 고부가가치 시장에서의 1인자 등극을 막거나 … 그 시점을 최대한 미루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 한국 반도체 산업이 나아가야 할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기적으로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만 한다면, 한국은 미국에 대하여 ‘슈퍼을’이 되어야 한다. 미국 주도의 양자 ICT 등 차세대 반도체 개발에 대등한 파트너로서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하고, 미국의 프렌드-쇼어링 시에는 공격적인 미세 공정 팹을 선제적으로 증설하여 TSMC와의 경쟁에서 우위에 설 필요가 있다. 실제로 TSMC는 중국과 같은 중화권으로서 인적 자원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미‧중 양자택일의 국면에서 만큼은 삼성전자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IPEF의 핵심 축인 인도, 아세안, 호주를 적극적으로 우리 가치사슬에 편입시켜야 한다. 인도는 팹리스 및 부품 설계, 호주는 차세대 반도체 개발에서 강점을 보이고 있으며, 아세안은 인구가 많아 소비시장으로서 중국을 대체할 수 있다는 점을 잘 활용해야 한다.

중국에 대해서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야 한다. 한국과 시장이 겹치는데다 기술격차도 많이 줄어든 만큼, 한국의 대중국 수출 감소라는 추세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굳이 정부가 이를 부추길 필요는 없다는 의미이다. 한편, 중국으로의 기술(암묵지) 유출을 막기 위해 엔지니어에 대한 처우 수준을 최소한 중국 기업이 제시하는 수준 이상으로 격상시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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