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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1. 3. 05:53

최근 읽은 책들에 대한 단평(6): 장강명, 임명묵, 한윤형

- 장강명홀수 장에는 살인자의 철학이 제시되고, 짝수 장에는 전형적인 사회파 추리소설이 펼쳐진다. 이 소설의 살인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무신론자 캐릭터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을 대놓고 인용하고 있는 것에 비해서는 역시 무게감이 너무 떨어지고 얄팍하기만 하다. 홀수 장들의 톤 자체가 애매해서, 작가가 살인자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인지, 비난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되어있다(바로 그런 식의 중립성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적 위대함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 그런데 이 소설은 그걸 감안하고 봐도 살인자 묘사가 너무 어정쩡하다). 최종적으로 소설의 결론은 후자(살인자 비난)에 가까워 보이는데, 그렇다면 홀수 장들은 의도에 비해 너무 무게를 잡은 것처럼 보인다. 톤 조절 실패다. 애..

2024. 11. 3. 05:24

차태서, <30년의 위기>를 읽고

좀 더 본격적이고 비판적인 긴 글을 써보려고 했지만 시간을 도저히 낼 수 없어 짧게나마 메모를 남기려고 한다. 트럼프 당선이 결코 예외적인 ‘사고’가 아니었으며, 미국사 속에 이미 존재해온 여러 경향성들 중 하나가 특정한 계기로 인해 발현된 것일 뿐이라는 점, 그리고 그러한 경향이 대내외적인 이유로 인해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라는 점을 상세히 논증하는 것은 2016년 이후 미국론의 기본과제다. 미국 국내정치의 포퓰리즘적인 경향성 강화라는 대내적인 요인과 중국의 부상 및 최근 국제사회의 야단법석(…)이라는 대외적인 요인은 저널리즘적인 수준에서도 누구나 짚어낼 수 있다. 차태서는 이것을 미국사의 맥락 속에 위치 지움으로써 역사적인 층위를 덧댄다. 그러니까 트럼피즘은 국내정치적으로는 잭슨주의, 대외적으로는 닉슨..

2024. 3. 6. 00:53

미중 전략경쟁의 본질과 향후 전망

미중 전략경쟁의 본질과 향후 전망: 케빈 러드, 을 읽고 1. 들어가며: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중국 전문가이자 호주 총리 출신인 케빈 러드가 쓴 미중전략경쟁에 대한 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이슈 특성상 시의성이 짙어서 5년 뒤, 10년 뒤에는 완전히 무용한 자료가 될 수도 있지만, 그래서 더더욱 지금 당장 읽어봐야 하는 책이다. 미중관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을 총망라하고 있다. 저자는 모든 장을 구체적인 사례들로 채우면서도 이를 능숙하게 압축 요약하고 있다. 책 자체가 이미 실용적인 요약서이기 때문에 굳이 책의 모든 내용을 상세하게 정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미중전략경쟁의 의미와 ‘중국 문제’를 바라보는 자세에 대해 떠올린 바를 간단히 정리해보려고 한다. 중국 문제를 바라볼 때는 양..

2024. 2. 1. 20:11

외교협상과 민족주의: <북일 교섭 30년>을 읽고

외교협상과 민족주의: 을 읽고 1. 고이즈미의 방북은 일본 외교의 ‘일탈’이었나 북한위협에 대한 억지를 주목적으로 했던 한미동맹과 달리 미일동맹은 그 출발부터 동북아질서 안정이라는 지역 수준의 전략적 목표 하에서 결성된 것이었다. 따라서 한미동맹이 한국의 국내정치와 정부 별 대북정책 기조에 따라 비교적 탄력적으로 운용되어온 것에 비해 미일동맹은 미국의 대전략에 종속되어 대체로 일관성 있게 운용되어 왔다. 미국 동북아 전략의 중심은 언제나 미일동맹이 차지해왔고, 한미동맹은 그 하위파트너에 불과했다. 미일동맹은 1951년 체결 이후 세 번(1978년, 1997년, 2015년)에 걸쳐 ‘안보 가이드라인(방위협력지침)’ 개정을 거치며 꾸준히 강화되고 발전(확장)해 왔다. 최근의 주목할만한 변화는 ‘아시아-태평양..

2024. 1. 24. 17:39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하나의 독법

가 , 와 동급의 고전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 이 소설에서 건질 것은 미국문학 특유의 시적인 언어 뿐이다. 그것만으로 이 소설이 영문학사의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나로선 왜 이 소설이 미국 대학 입시를 위한 필독서로 꼽히는지 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SAT나 에세이 대비용 ‘모범생 소설’이 꼭 몇 편 있다. ‘적당한 깊이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정치적으로 안전한’ 주제는 인터넷에 검색해서 암기해버리면 그만이고, 중요한 것은 영어 자체가 된다. 이런 소설들은 현지 고등학생이나 유학준비생들에게 고급 어휘와 문장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영어 교재’로서의 의미가 크다. 는 거의 대표적인 ‘모범생 소설’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그나마 원서도 아닌 번..

2023. 12. 27. 19:47

최근 읽은 책들에 대한 단평(5): 중국 고대사, 축구, 로스쿨

『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 심재훈 ‘어느 비주류 역사가의 넋두리’를 부제로 하는 이 책은 저자의 페이스북 글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다. SNS 글을 모은 것이다 보니 딱히 체계나 구성을 제대로 갖추었다고 할 수는 없는 책이었다. 하지만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어 있지 않은 구미 동양사학계의 시각에서 동양학의 여러 현안들을 두루 다루는 드문 기획으로서, 한국어로 된 다른 문헌에서는 쉽게 접하기 힘든 귀한 시각을 제공하고 있어 일독의 가치는 있다. 먼저 미국학계가,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양학에 있어서도 세계적인 성취를 갱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저마다 ‘동아시아 언어문명학부(EALC : East Asian Language and Cul..

2023. 11. 12. 04:18

Now And Then

1. 태어나기도 전에 활동하던 옛날 가수를 좋아하는 것은 때로 불행이다. 그 가수의 라이브 공연이나, 신곡발매의 감격 같은 것은 일찌감치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라이브 공연에서 연주되는 모든 노래를 따라 부르는 일의 즐거움이나, 그들의 신곡을 기다리는 일의 가슴 설렘을 평생 느끼지 못할 운명인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무려 1960년대에 활동하던 밴드의 라이브 공연과 신곡발매를 모두 경험하게 되다니, 세상에 이런 기적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시간의 벽을 뚫고 도착한 음악이었기에 감격은 갑절이 되었다. 이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활동하던 가수를 좋아하는 것은 불행이 아니라 행운이다. 혹은, ‘덕질은 반드시 보상받는다’. 2. 8년전, 폴 매카트니의 서울 공연을 직관한 것은 어..

글쓰기에 대한 잡담(1): “남들보다 잘하고 싶은 게 뭔가요?”

1. “남들보다 잘하고 싶은 게 뭔가요?” 잠시 머뭇거리다 ‘글쓰기’라고 대답했다. 얼마전에 우연히 학교에 심리 상담 센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등록금도 냈겠다, 특별히 심리적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졸업 전에 한 번쯤 그런 것을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과감하게 심리검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심리학 자체에 특별히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카운슬링, 내면탐구, 뭐 그런 것을 원래 좋아한다. 초기조건을 정확하게 알면 그 물체의 미래를 알 수 있다는 물리학의 법칙을 따라, 인간의 운명이나 인생의 향방도 그 사람의 타고난 기질과 성향을 정확하게 파악하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은영 박사가 출연하는 방송의 유튜브 클립들도 챙겨보는 편이다. 지나치게 스스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