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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2. 3. 08:10

최근 읽은 책들에 대한 단평 (3): 자살, 퀴어, 부족주의

『숭배, 애도, 적대』 - 천정환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고, 자주 울컥했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자살 문화에 대한 일종의 계보학을 시도한다. 90년대 대학생들이 주도한 ‘분신정국’과 2000년대 노동자들의 분신 사건들 사이의 연속과 단절을 검토하는 것으로 출발하여 정치인, 공무원, 연예인의 자살을 분석한다. 자살은 언어(상징계)를 초과하는 사건이라서 근본적으로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건 자살을 하는 당사자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 분석하는 자살자들의 유서는 그래서인지 많은 경우 자신보다 더 큰 대상을 ‘위해서’ 죽는다는 식의 서술을 담고 있다. 그들은 반미자주투쟁을 위해서, 노동자 권리를 위해서, 당을 위해서, 조직을 위해서 자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에는 언제나 내밀한 사적인 동기도 작용..

2023. 1. 18. 04:53

이시윤, <하버마스 스캔들>을 읽고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의 하버마스 수용 ‘실패’에 대한 지식사회학적 분석을 담은 (엄청나게 재미있는) 책이다.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엮은 것인데, 지도교수인 김경만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에서 다소 신경질적(?)으로 제기되었던 문제의식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고 본격화한 것으로 읽힌다. 개인적으로는 무협지 읽듯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현역으로 활동 중인 국내의 철학자‧사회학자들의 실명이 난무하는 뒷부분의 분석도 인상적이지만, 앞부분에 이론적 틀로서 제시된 부르디외의 ‘장 이론’에 대한 명료한 설명도 유익하다. 어째서 한국에는 ‘자생적 이론’이나 ’독자적 학파‧사상’이 없는가? 이 물음에 대해 지금까지 제출되어온 학계 자신의 설명은 내인론과 외인론으로 양분된다. 내인론은 학자들이 한국사회만의 문..

2023. 1. 12. 05:42

이관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를 읽고 (+번외)

개인적으로 경영학이 지나치게 ‘속물(?)학문’ 취급당하는 것이 불만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비중을 차지하는 행위자는 단연 기업일 텐데, 그 기업 행동의 일반원리를 제시하는 학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경영학(business-administration)만큼 중차대한 학문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야 경영학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사실 경영학과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서 인상비평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대학생들에게 일반적으로 경영학은 학문적인 논의의 대상이라기 보다 ‘회계사(CPA) 수험과목’이거나 ‘취업이 잘되는 전공’에 불과하다. 경영학은 그 내부에서 뭔가 비판적인 논의나 대안제시가 불가능한 학문인 것처럼 느껴진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경영학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

2023. 1. 8. 21:49

지식인과 실천: 임지현의 사례에 비추어

지식인과 실천: 임지현의 사례에 비추어 – 임지현, 를 읽고 - 1.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임지현의 학술적 자기-기술지이다(저자는 ‘에고 히스토리’라고 부른다). 나는 이런 책을 참 재밌어 하는 것 같다. 김경만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 이영석의 『삶으로서의 역사』에 이어 또 학자의 회고담이다. 이번 임지현의 책에 대해서는 지식인의 ‘실천’과 관련하여 생각한 바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김경만과 이영석이 모두 실천과 거리를 두면서 학자로서의 성실함, 김경만의 경우 특히 글로벌 지식장에 적극적으로 부딪히고 도전하는 방식의 치열함을 미덕으로 여겼다면, 임지현은 상대적으로 실천가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런데 그 실천이 특정 정파를 지지하는 식의 속류적인 방식이..

2023. 1. 7. 07:42

최병천, <좋은 불평등>을 읽고

읽는 내내 짜증스러워서 몇 번이나 책을 덮을까 고민했다. 아주 나쁜 책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장 상태가 엉망이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문장이 뚝뚝 끊기고 어색한 표현과 인용이 자주 등장한다. 초등학생 작문 숙제를 보는 느낌이다. 글 자체를 거의 써보지 않은 사람의 글이다. 추측건대 저자는 업무보고서 식의 개조식 글쓰기만 해온 사람인 것 같다(편집자는 뭘 한 건가?). 어떤 것들은 황당할 정도인데 혼자 보기 아까워서 웃긴 것들을 옮겨 적어본다. “(1) 경제학적으로 볼 때 수출, 투자, 성장, 고용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2) 수출이 잘되면 투자가 늘어난다. (3) 투자가 늘어나면 성장률이 높아진다. (4) 투자와 성장률이 높아지면 고용이 창출된다. (5) 이는 한국경..

2023. 1. 5. 03:00

염운옥, <낙인 찍힌 몸>을 읽고

작년에는 유독 ‘이민’, ‘정체성’, ‘인종’ 등 문화정치학의 개념어들을 다룰 일이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 그것들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대중서로서 인종과 관련된 대중문화 컨텐츠 및 이슈들을 광범위하게 인용하며 ‘인종’이라는 문제적인 범주의 형성, 수행, 재생산의 과정을 추적한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이나 마치 교양강의를 듣는 듯 무척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어(실제로 저자의 대중강연이 책 집필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아주 흥미롭게 읽었고, 표지도 화려해서(?) 퍽 마음에 들었다. 중‧고등학생들을 상대로 이 책을 읽히면서 독서토론 수업을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서술은 평이해서 대중교양서의 한 모범을 보여주는 듯하다(최대다수의 독자를 상대로 한 대중서를 쓰..

2023. 1. 3. 02:34

권석준, <반도체 삼국지>를 읽고

미‧중 패권경쟁의 전선이 기술 및 산업 영역까지 번지면서 이제 국제정치에 대해 말하기 위해 반도체 제조기술까지 공부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책은 ‘경제안보’가 화두로 떠오른 최근의 국제정치적 맥락을 비교적 충실히 고려하면서 반도체 산업의 역사와 최근의 기술적 쟁점을 소개하고, 한국 반도체 산업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이 주식 투자자 독자를 염두에 둔 반도체 기술 관련 서적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다만 서술의 밀도가 균일하지 않고 구성도 그다지 유기적이지 않아서 단행본으로서의 완결성은 떨어지는 편이다. 1. 반도체 산업 주도권 이행: 미국에서 일본으로 역사적으로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은 미국(70년대), 일본(80년대 초‧중반), 한국과 대만(2000년대)으로 ‘서진’해왔다. 20..

2022. 12. 27. 23:57

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읽고

유명한 페미니스트 저술가 벨 훅스의 페미니즘 입문서이다. 페미니즘 입문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고 해서 일부러 시간을 내서 읽어보았다(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벨 훅스의 또다른 저서 『페미니즘 – 주변에서 중심으로』를 읽은 바 있다). (저자의 문제의식을 대강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의외였던 것은 이 책이 국내에서 가장 대중적인 페미니즘 입문서 중 하나임에도, 기성 페미니즘에 대해서 시종일관 집요하게 비판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의 적이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임을 분명히 하면서, 페미니즘의 다양한 얼굴들 중 다른 정체성에 대해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과격한’ 부류는 사실상 ‘착취와 억압’에 동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급진적(radical)’이지 않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