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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8. 18. 06:23

정의길, <유대인, 발명된 신화>를 읽고

한겨레신문 국제부 정의길 기자의 세 번째 책이다. 이제 보니 정의길 기자의 책을 모두 읽었다(, ). 그런데 그의 책들은, 저자의 박학다식함에도 불구하고, 읽을 때마다 묘하게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어 (벌써 읽은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중동문제를 다룬 정의길의 은, 같은 언론인 출신인 박정욱 PD의 보다 훨씬 잘 안 읽혔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왜 그런지 생각해봤는데 문단과 문단, 장과 장, 나아가 책의 전체 구성이 유기적이지 않고 단순 나열식에 가까워서 그런 듯하다. 좀 심하게 말하면, 책 전체가 특집 기사들의 단순 모음집 같다. 이런 방식은 진행자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거나 해당 주제에 대해 ‘썰을 푸는’ 포맷의 대담 프로그램에는 잘 어울리지만(실제로 저자가 각종 영상매체에 출연..

2023. 8. 9. 16:17

왜 <인간실격>에 열광하는가?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시리즈 중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은 헤세의 , 카뮈의 ,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의 이다(알라딘 기준 1위 , 2위 , 3위 . YES24 기준으로는 1위가 , 2위 , 그리고 은 4위다. 실제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샐린저의 이라고 한다). 이나 이 많이 팔리는 것은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헤세와 카뮈는 어쨌든 둘 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이고, 이나 자체도 이른바 서구식 부르주아 교양주의 정전 목록에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사실 그래도 의 인기는 좀 이상하다. 헤세 작품 중에서 서구에서 더 많이 읽히는 작품은 나 이고, 헤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작품은 대작인 다. 그리고 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헤세를 일반적인 의미의 ‘소설가’라고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을 품게 된다(시인에 가깝다). 전쟁..

2023. 8. 7. 23:24

최준석, <물리 열전>을 읽고

저자는 조선일보 기자 출신 언론인이다. 서문의 제목 ‘이제 사람으로 과학을 배운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국내 과학자들을 상대로 한 기획 인터뷰 기사 모음집이다. 이 접근 자체는 매우 신선하고 적절한 것이다. 자연과학 교양에 대한 수요와 공급 자체가 적지 않음에도, 현재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른바 ‘노벨상급’ 과학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국내 물리학자 47인의 연구관심과 개인사를 소개하면서 오늘날 한국 물리학계의 분위기를 비교적 생생하게 전달한다. 현대사회에서 지식은 선구자적인 과학자 개인의 영감이나 천재성이 아니라 (국제적) 학술 커뮤니티의 협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결국 과학지식이라는 것도 사람과 제도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책과 같은 ‘열전 ..

2023. 6. 20. 19:20

이반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을 읽고

투르게네프의 대표작으로 반드시 거론되는 『아버지와 아들』은 생각보다 지루한 소설이었다. 이렇다 할 ‘사건’도 없고,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처럼 아주 강렬한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이 소설이 재미있었으려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속 라스꼴리니코프나 이반 카라마조프 같은 강렬한 역할을 주인공인 바자로프가 했어야 하는데, 소설을 읽어보면 바자로프는 다소 희화화되어 묘사되다가 마지막에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서정적인 순간은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바자로프의 양친을 묘사할 때다. 소설 속에서 ‘아버지(세대)와 아들(세대)’의 ‘영원한 화해’는 죽은 자식의 무덤가 앞에서나 가능했다. 그것이 투르게네프의 정치적 입장을 암시하는 것인가를 두고 당대에도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2023. 6. 12. 00:04

상반기 독서: <한국 사회과학의 기원>과 <대륙법 전통>

늘 그렇듯 올 상반기에도 바빴다. 연초와 3월 즈음에 읽었던 두 책에 대한 단평을 업로드한다. 『한국 사회과학의 기원』 - 홍정완 저자의 역사학 박사학위 논문을 펴낸 이 책은 ‘사상사’ 연구를 표방한다. 역사학 연구의 특징인 것인지, 광범위한 사료를 제시하고 있을 뿐, 전체적으로 서사가 명확하지는 않다. 따라서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자료들에 기초하여 나름대로 서사를 명료히 해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제목과 달리 ‘사회과학’ 자체는 이 책의 관심대상이 아니다. 정치학과 경제학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냉전기 한국의 (사회과학) 지식체계를 검토한 다음, 그것에 기초하여 전개되어 온 한국의 ‘근대화 담론’의 지형을 펼쳐 보이는 것이 책의 주된 관심이다. 냉전 시기의 사회과학 지식에 주목하는 것은 그..

2023. 4. 10. 18:30

김은정,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을 읽고

‘근‧현대 한국에서 장애‧젠더‧성의 재활과 정치’라는 부제를 보고 손에 들었으나 꼼꼼히 읽지는 않았다. 제목을 보고 한국의 장애운동 및 장애 당사자에 대한 세밀한 에스노그라피를 예상했으나 문학작품 및 시각매체에 대한 문화비평을 주로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의 서두에 언급하고 있는 ‘황우석 기념우표’에 이 책이 하고자 하는 말이 다 들어있다. 황우석 기념우표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의 단계로부터 점차 ‘이족보행’이 가능한 비장애인으로 ‘진화’하는 사람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다. 장애란 의학적 개입을 통한 ‘치유’의 대상이라는 ‘비장애 중심주의’ 이데올로기가 노골적으로 반영된 이미지인 것. 나의 최근 장애문제에 대한 관심과 고민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 “장애는 존재해도 좋은가?”. 물론 장애는 그 자체로..

2023. 2. 15. 02:01

정현채,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를 읽고

‘죽음학 강의’로 유명한 정현채 교수의 대중서이다. 이 책은 독자의 태도에 따라 독후 감상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책이다. 스스로를 죽음의 당사자로 진지하게 규정하고 있는 독자는 이 책을 매우 절절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이 책을 사이비-유사 과학서로 폄하할 것이다. 나는 절절하게 읽은 쪽이다. 죽음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덜해졌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 우리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임사체험자들의 경험담을 통해 죽음 ‘직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환한 빛을 보았고’, ‘먼저 죽은 가족이나 친구의 형상을 보았으며’, ‘유체이탈 현상을 경험했고’..

2023. 2. 8. 12:50

사회과학은 과거를 재현할 수 있는가? : 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을 읽고

사회과학은 과거를 재현할 수 있는가? : 로드니 스타크, 을 읽고 1. 들어가며 3세기 후반 급격한 기독교의 성장은 서양 고대사의 중대한 미스터리 중 하나다. 변방의 미약한 ‘예수운동’은 어떻게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될 수 있었는가? 신앙인들은 거의 불가해한 수준의 이 ‘기적적인’ 도약을 그 자체로 기독교적 진리의 현현(顯現)이라고 보거나 예수 부활 사건의 간접증거로 삼는다.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은 이 미스터리에 대한 최초의 문학적‧신학적 대답이기도 하다. 교회사가들 역시 기독교로의 ‘대규모 개종’ 원인을 기독교 교리의 우월성이나 순교 사역의 진실성에서 찾는 등 신학적인 설명 이상을 제공하지 못한다. ‘기독교 발흥’의 전후 사정이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것은,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