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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 3. 02:34

권석준, <반도체 삼국지>를 읽고

미‧중 패권경쟁의 전선이 기술 및 산업 영역까지 번지면서 이제 국제정치에 대해 말하기 위해 반도체 제조기술까지 공부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책은 ‘경제안보’가 화두로 떠오른 최근의 국제정치적 맥락을 비교적 충실히 고려하면서 반도체 산업의 역사와 최근의 기술적 쟁점을 소개하고, 한국 반도체 산업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이 주식 투자자 독자를 염두에 둔 반도체 기술 관련 서적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다만 서술의 밀도가 균일하지 않고 구성도 그다지 유기적이지 않아서 단행본으로서의 완결성은 떨어지는 편이다. 1. 반도체 산업 주도권 이행: 미국에서 일본으로 역사적으로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은 미국(70년대), 일본(80년대 초‧중반), 한국과 대만(2000년대)으로 ‘서진’해왔다. 20..

2022. 12. 27. 23:57

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읽고

유명한 페미니스트 저술가 벨 훅스의 페미니즘 입문서이다. 페미니즘 입문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고 해서 일부러 시간을 내서 읽어보았다(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벨 훅스의 또다른 저서 『페미니즘 – 주변에서 중심으로』를 읽은 바 있다). (저자의 문제의식을 대강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의외였던 것은 이 책이 국내에서 가장 대중적인 페미니즘 입문서 중 하나임에도, 기성 페미니즘에 대해서 시종일관 집요하게 비판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의 적이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임을 분명히 하면서, 페미니즘의 다양한 얼굴들 중 다른 정체성에 대해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과격한’ 부류는 사실상 ‘착취와 억압’에 동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급진적(radical)’이지 않다고..

2022. 12. 26. 07:01

최근 읽은 책들에 대한 단평 (2): 식민지-근대, 전장연, 일베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 - 윤해동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윤해동은 임지현과 함께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해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하며 2000년대 국내 인문학계에서 ‘탈민족주의 논쟁’을 주도한 역사학자이다. 이것을 한국 인문학계의 (구소련 몰락 이후 운동권 좌파와는 또다른 방식의) ‘포스트 모더니즘’ 수용사례로 평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윤해동은 ‘식민지-근대’라는 개념을 통해 국사학계의 ‘식민지 근대화론’ 대 ‘내재적 발전론’의 이분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양자는 모두 민족주의 대 반민족주의 틀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 근대주의적 편향을 가지며, 한국사회가 오늘날까지 유독 ‘원초주의적 민족주의관’에 몰입하고 있는 것과 인식의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저자가 보기에 근대는 언제나 식..

2022. 12. 24. 21:31

훙호펑, <차이나 붐>을 읽고

1. 총평 중국 정치경제 관련서 중 가장 종합적이다. 1부는 비교 역사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중국 자본주의의 기원을 거시적으로 조망하고, 2부는 이코노미스트적인 감각으로 중국 경제의 미래를 전망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자는 중국식 성장모델이 세계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미국에 맞서 새로운 ‘보편’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신화를 공박하고자 한다. 2. 중국에서 자본의 장기적 부상 중국 경제사 서술이 흔히 마오 집권기의 사회주의적 계획경제(1949~1978)와 덩샤오핑 집권기의 자본주의적 전환(1978~) 사이에 극적인 단절을 설정하는 것에 반하여, 저자의 비교 역사사회학은 두 시기가 거시적으로 ‘자본의 장기적 부상’이라는 측면에서 연속적임을 보여준다. 17-18세기 중국의 상업적 번영이 19세기 유럽과 같은 자본주의..

2022. 12. 18. 02:52

니컬러스 크롱크, <인간 볼테르>를 읽고

볼테르(1694~1778)는 프랑스혁명이 있기 10여년 전에 죽었으나, 혁명 이후 팡테옹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프랑스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볼테르가 귀족들과 잘 어울렸고 계몽 군주들과의 서신 교환에 열심이었으며 광신적 열정을 혐오했다는 것을 떠올리면 그가 오늘날 혁명의 상징이 된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나 볼테르는 일평생 자기 자신의 삶을 연출하여 ‘대중’ 앞에 내 보이는 ‘공연 같은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이런 ‘오해’를 싫어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생전에도 ‘항상 자신이 무대 위에 있다는 자각 속에서 살았다’. 이것은 볼테르가 일생에 걸쳐 남긴 방대한 저술의 장르적 다양성만큼이나 후대인들로 하여금 그가 정확히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기 어렵게 한다. 저자는 볼테르의 다면적인 생애를 중심으로 볼테르와 ..

2022. 12. 13. 22:05

한국에서 “데이터 저널리즘”은 가능한가?

한국에서 “데이터 저널리즘”은 가능한가? – ‘나쁜 이대남 그래프 논쟁’을 중심으로 1. 분야를 막론하고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결정 및 현상 분석이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저널리즘 영역에서도 데이터를 활용하여 사실을 전달하는, 이른바 ‘데이터 저널리즘’을 구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등장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지식 컨텐츠 스타트업’을 표방하는 ‘언더스코어’와 SBS 탐사보도 팀 ‘마부작침’이 데이터 저널리즘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으며, 한겨레, KBS 등 기성 미디어도 외부 전문가와 협업하여 도출해낸 데이터 분석결과를 보도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엔 이른바 ‘데이터 민주주의 시대의 도래’라는 범 시대적 맥락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국가 및 지자체가 축적한 행정데이터를 ‘공공데이터’라는 이름으로 공개하고, R..

책에 대한 잡담 (2) – 왜 읽는가?

1. 아주 어릴 때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세속적 성공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국어 능력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어서 언어적 두뇌가 일찍이 발달한 경우, 아무리 상식과 교양이 부족해도 제한된 시간 안에 기계적으로 텍스트를 소화해내는 것이 관건인 수능이나 리트(LEET), 피셋(PSAT) 같은 언어 시험은 잘 볼 수 있다. 그 시험들을 잘 보면 변호사도 되고 공무원도 될 수 있다. 상식, 교양, ‘지식’은 ‘지능’과는 별 상관이 없다. 그러나 ‘머리가 굳은’ 성인기 이후에 과하게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여러모로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2. 우선 잡념이 많아져서 일상생활을 하는데 방해가 되고, 애매한 잡지식이 늘어서 허무맹랑한 사람을 만든다. 대표적인 것이 나다. 예를 들..

2022. 10. 23. 17:17

김수아/홍종윤, <지금 여기 힙합>을 읽고

내 인생의 커다란 행운 중 하나는 정말 우연한 계기로 어렸을 때(만 9세!) 비틀즈를 통해 팝에 입문했다는 것이다. 자칭 ‘비틀매니아’ 출신이므로 한때 나에게 팝송은 무조건 밴드 음악과 로큰롤이었다. 나는 락의 족보를 그리려고 여러 번 시도하고 실패하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락 음악의 흐름과 지형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이답지 않게 이런 식의 우스갯소리가 낯설지 않다 – “세 보이고 싶다면 메탈리카, 메가데스, 슬레이어 같은 스래시 메탈을 좋아하는 척하면 된다. 이때 메탈리카는 살짝 무시하면서 슬레이어를 ‘빨거나’, 메가데스를 치켜세우면 그야말로 ‘락잘알’ 행세를 할 수 있다. 진짜로 ‘고인 물’인 것처럼 보이고 싶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딥퍼플이나 블랙사바스를 점잖게 지지하면 되는데, 동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