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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14. 01:12

철부지의 존재론(『그래도 우리의 나날』 (시바타 쇼))

오하시와 세쓰코의 약혼은 체념의 결과였다. 오하시가 단념한 것은 내면의 공허감 자체였다. 그는 공허를 채우기 위해 방탕한 여성편력을 일삼았는데, 상대방 중 한명인 ‘유코’의 자살을 계기로 죄의식에 시달리며 ‘수시로 파트너가 바뀌는 연애를 끊고’ ‘충실한 생활’ 대신 ‘내실 있는 생활’을 구축하기로 한다. ‘충실한 생활’이 내면의 공허감을 마주하고 그것을 무엇으로든 채우는 삶이라면, ‘내실 있는 생활’은 공허감의 존재를 무시한 채 그럴듯한 사회인으로 복무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세쓰코는 대학교 선배 ‘노세’로 상징되는 혁명적 열정에 대한 단념의 결과 동네 친구였던 오하시를 약혼 상대로 결정한다. 혁명적 열정에 대한 단념의 직접적 계기는 일본 공산당이 무장투쟁 노선을 포기하고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한 ‘육전..

2021. 12. 14. 01:06

단편들로 모색한 인간 구원의 대서사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카버가 묘사하는 도회의 일상은 ‘더러운 리얼리즘(Dirty realism)’이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너절하다. 『대성당』의 단편들은 ‘가정파탄의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알코올 중독과 이혼이라는 그의 소설 속 ‘상수’는 장엄한 비극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시시콜콜하고 핍진하다. 인물들은 너절한 일상으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지만, 그들은 아주 사소한 계기로 무너져 버리는 구원의 허약한 구조만을 확인할 뿐이다. 아들에게 선물하려고 했던 손목시계(『칸막이 객실』)는 마이어스의 구원을 지탱하는 마지막 주춧돌이었다. 고인 물(『보존』)이나 집 주인의 퇴거요청(『셰프의 집』), 전화 한 통(『내가 전화를 거는 곳』)만으로도 인물들이 기대하던 구원은 좌절되어버린다. 너절한 일상과 구원의 불가능성, 이것이 카버의 리얼한 출발..